고슴도치 딜레마

어릴 때부터, 고민하던 어떤 종류의 생각이 모양새를 갖췄다고 여겨질 때면 그에 대해 충분히 설명된 전 시대의 글들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늘 먼저 살아 간 사람들에게 감탄한다. 오랜 세월을 견뎌 낸 글에는 힘이 있다. 비록 나는 그 표면을 훑고 마는 것이지만 언젠가 경계를 넘어 그것들에 깊숙히 스며들기를 바란다.

근래에 든 생각은 쇼펜하우어에 의해서 고슴도치 딜레마 (Hedgehog’s Dillemma)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왜 우리는 외로움과 상처주기를 반복하는가.
결국 우리는 개인의 가시 바깥에 타인을 남겨둘 수 밖에 없는가.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나이를 오물오물 곱씹어 먹으면 그 경계를 긋는 것에 익숙해지리라 생각한다.
덕분에 덜 상처입고 덜 아프고, 그리고 덜 뜨거울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인생은 한번뿐이라 좋은 것’이라는 익숙한 결론에 도착한다.
정도를 추구한다는 것은 출렁임 하나 없어 ‘시간이 멈춰버렸나?’하고 흠짓 놀라게 하는 강을 보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그리고 조금은 식어버린 듯한 느낌도 든다. 풍경을 바라보는 눈길과 생각이 점차 아래로 가라앉는다.
오랜 세월 자신을 가꾸며 늙은 이들을 보면 너무도 곱게 익은 단풍과 식어버린 강 같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이면이 있는 것이다.

차라리 저 악독한 조가 놈처럼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寧我負人 無人負我 (영아부인 무인부아)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지게 하지는 않겠다.”

악당 버전의 인생이 맘에 들지 않으면 온갖 세상 아픔 다 짊어지고 고고한 새처럼 살아보는 것도 괜찮다. 고슴도치 속 한 마리 가시 없는 짐승은 얼마나 상처를 받아낼 것인가.

그렇다. 이건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하는 뻘글이다.
노래도 무의미한 타자가 끝 마치자마자 유튜브가 랜덤으로 뽑아줬을 뿐이다.
원래 사는 게 그렇다.

유서

오늘은 유서를 적었다.

당장 죽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을 미리 해놔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올해 외할머니를 보내고 어르신들의 예정된 죽음을 목도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생각이 매듭을 맺었다.

눈에 보이는 일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적으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언젠가는 나 없이 세상에 남겨질 소중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담았다.
그리고 그렇게 정리된 생각은 다시 내게 대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