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생각이 나서 적어보는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
어린 시절 존경하던 어른들의 나이가 되고나니, 그 분들조차 이리저리 흔들리는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동시에 순간 순간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 흩어지는 나날들과 싸우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이제는 그 분들을 어렸을 때만큼 존경하지는 않는다. 대신 전보다 훨씬 더 좋아하게 되었다. 자신을 지켜나가는 모습이 멋있다.
나는 크던 작던 실수가 잦은 편인데, 앞으로도 바보 짓의 연속 일 것 같다. 정말 그렇게 될 것이다. 종종 실수할 것이고, 누군가와는 상처를 주고 받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내 어린날의 이기적인 모습에 얼굴이 붉어질 것이고, 후회로 얼룩지는 날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을 도덕적으로든, 타인의 감정을 헤치지 않는 방식으로든간에 완벽하게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마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보통의 사람이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근래에 특정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는 늘 겸손을 향해 간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문제를 바라보는 이기심을 모두 덜어내고도 한편에서의 정의가 다른 편에서의 정의와 완전히 중첩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 문제에 대해 소신과 겸손한 태도를 갖추고 있을 것. 어떤 문제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정하지 않으면 기계적 중립의 덫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겸손이란 스스로 공격받지 않기 위한 방어적인 태도와 다르다. 내가 지지하는 의견조차 한편으로는 한계가 존재함을 인지하고 있는 자세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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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존재에 대해 공감, 스스로의 개선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일 것. 나와 닮은 사람이 완벽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저 나랑 비슷한 부족한 사람일 뿐이다. 나와 닮아있다는 사실은 편안함만을 보장한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면 자신과 다른 부분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틀림이 아닌 다름의 영역으로 뻗어나가 스스로를 넓혀 성장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이와 노인이 죽었을 때 어떤 문화권에서는 앞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던 어린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고, 반면 또 다른 곳에서는 노인의 지혜를 잃은 것을 슬퍼한다고.
두 의견 모두 설득력이 있다.
나는 하얗게 태어나 자신의 도화지 위의 그림을 거침없이 고쳐나가는 그런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정말 잘 쓰셨네요. 특히 어떤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는 겸손을 향한다는 표현이 정말 인상깊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부족한 글에 공감해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
메이비스님, 즐거운 주말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