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경주할 노력

남에게 충고하지 말라.

살다보면 스스로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렇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다.
즉, 세상에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확실하지 않은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정말 내 자신이 맞고, 상대는 틀린 정량적인 문제라고 해도 문제점을 지적하지 말자.
문제의 정답과 별개로 잘못을 수용하기 위한 감화력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심지어 수용성이 뛰어난 사람들조차도 상처를 받는다.
정말 잘못된 생각이라면 곧 스스로 깨닫거나, 머지않아 진실로 가까운 내부의 사람을 통해 고쳐질 것이다. 그리하여 고쳐지지 않는 사람이면, 내가 말해도 고칠 수 없던 것이다.

상대가 어떠한 문제에 관해 구체적이고 한정적인 내 의견을 물어볼 경우에는 오직 그에 한정해서 오직 나의 의견임을 명확하게 밝힌 후 얘기 해봄직하다.
그 이상의 내 가치관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향기가 풍기는 것과 같이 스며드는 것이지, 나는 이렇다라는 자기 주장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과 실제는 또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도 충고하지 말라.
글과 말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매우 부분적이다. 직접 접하지 못한 것은 경험이 아닌 지식으로 남을 뿐이다. 그래서 같은 말에도 우리는 무게감이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스스로 실패해 볼 기회를 박탈하는 폭력을 가해서는 안된다. 말과 타인의 경험으로 배운 것은 진짜가 아니라 언제든지 다시 잃을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실수를 박탈하여 성인이 되어 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작은 실수를 자주하고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다.

2018.08.22

간만의 뻘글.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를 여유롭게 빨다가 생각했는데.
노화는 꽤나 합리적인 전략이다.

물론 내 개인의 의지는 고려되지 않은 오로지 유전자의 영속성 관점에서 생각되는 일이지만. 아무튼 그렇다.

살다보면 다치기도 하고, 이런 일 저런 일을 겪으면서 신체가 최적의 상태를 유지할리없다.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성이 떨어지는 점이 가장 클 것이다. 성장기를 거치고 난 뒤 한동안의 환경에 최적의 신체를 유지하겠지만 그 뒤로는 변화하는 환경에 생물학적인 능동적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

그러니 주기적으로 새 틀로 갈아타는게 참 합리적인 전략인 셈이다.

그래도 나라는 자아가 보기에는 밥맛 떨어지는 결론이다.
더 고민해보면 자연은 의지와 개인의 자아에 별 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은 모양이다.
경험에 대해서도.
경험이 중요하다는 건 의외의 환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경험은 미래를 방해하기도 하니까. 더해서 고민해보면 자아라는 것도 인간의 제일 끔찍한 환상과 희망일 수 있겠다. 나야 Freeunwill은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사람이지만, 꼭 그렇다는 건 아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빅뱅을 상상한 천재들이나 가능하지, 난 내 두뇌로 내 차원을 뛰어넘는 상상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짜 낼 수 있는 옷은 이 세상에 주어진 옷감 그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바나나 우유를 다 마셨지만 조금 더 머리를 써보자면.
반대로 개인의 자아와 경험이 어떤 임계점을 넘어선다면 생물 스스로가 노화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인간의 역사가 보여주듯 노화가 먼저 정복될 것 같다. 사람들은 복잡계보다는 기계를 다루는데 능하고, 생물을 기계처럼 바라보는 것도 썩 잘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일 엄청난 태풍이 온다고 하는데 내 방은 덥다는거다.

2018.07.06

요즘은 삶의 모든 것에 대한 의욕이 없어서, 이것 저것 그저 만지작 거리고 있던 차에, 예전에 깔아두었던 구글어스 프로와 스페이스 엔진에 손이 갔다.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는 세상의 광대함은 온 몸을 쭈뼛하게 만들었다.

“There are only two ways to live your life. One is as though nothing is a miracle. The other is as though everything is.” 라던가.

혐오에 대해 조금 적어 봄

요즘 시대의 혐오라는 것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나는 혐오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인간적으로 추구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혐오는 차이에서 발생하는 균열을 메꿀 의지가 없을 때 발생한다.
오해라는 것은 늘상 있는 것이지만, 그 문제를 끌어안고 싶지 않을때.
그 귀결은 혐오로 향한다.

재수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너나 나나 다 같이 틀렸다.
완벽한 것은 없고 누구나 조금씩 혹은 더 많이 틀렸다.
무작정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논의를 전혀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양하자.
언제나 당시의 상황에서 각각 양보해야 할 절충선이라는 것이 흐릿하더라도 존재한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 서로 할퀸 부분을 다시 서로 메꾸며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과정을 미루어 놓고, 변하기 싫은 시시한 자기 자신을 인정하기 싫어서.
타인을 끌어안아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편리한 혐오를 선택할 뿐이다.

혐오는 편리하다. 그리고 변화를 싫어한다.
사랑의 부재다.
나약함에 대한 증거다.

별을 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내자.

마음을 꿰어 하늘에 걸어두고 작은 나를 내려보자.

밤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런 나라도 반짝일거야.

걸어둔 맘이 눈에서 달아나지 않도록 고개를 들어.

진짜 별이 되는 날.
빛나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 봐 줄 누군가를 위해 반짝이고 싶어서 오늘을 짜내.

생각의 유연함

개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인간사는 관점의 문제다.

어른들이 세상을 어렵게 사는 것은 천박함이 쉬이 전염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것보다 빼앗는 것이 쉽고 빠른 전략이다.
때문에 사회에는 작은 악행들이 전파되고, 상처받고 다시 전염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부정적이고 어두운 믿음을 내면화한다는 점에 있다.

세상은 그저 있는대로 돌아갈 뿐이고, 사람이 선택한 가치관 각각에는 항상 거시적인 면면이 있다.
다수는 경험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처를 확대하고 흉터를 온 몸으로 잠식시킨다.
누구라도 세상을 부분적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점에 있어서, 이는 순전히 개인적 경험이라고 반문해볼만도 하다. 그러나 순수함을 잃어가는 것이 개인적 측면에서도 좋은 영향을 끼칠리 만무하다.

세상을 살아가며 이미 세우고 앞으로 세울 원칙들이 자신을 옭아맬 수도 있다.
과거의 경험은 현재를 제대로 살게하는 맞춤 양복이 아니다.

내 외부의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내 안에서 어떠한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결국 그것을 수용하고 말고는 내 선택의 문제다.
내가 살아온 시간과 함께한 생각들이 스스로에게 어떤 생각을 발화시키더라도 결국 그것을 수용하고 말고는 내 선택의 문제다. 관점/생각은 스스로가 비틀 수 있다.

삶을 즐거운 여행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을 유연하게 다루는 법을 배워야한다.
무언가를 쉽게 믿지말자. 자신의 믿음은 무의식을 이끄는 나침반이기 때문에 그 단어 하나까지도 엄밀하게 따져야하며, 하나의 격언 따위가 내 삶을 온전히 지배해서는 안된다. 늘 깨어있기를.

구름 너머

무지개가 피어난 곳.
뭉게뭉게 피어난 소문 뒤로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삶 고개를 구비 구비 내려보며
눈물의 씨를 뿌리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올려볼 적에는 또렷하던 것이
실은 디딜 곳이 하나 없이 높은 바다인 것을 보았습니다.

가슴이 저물듯 아파와
어느 한 점 눈길을 두기 벅차니
이제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18.02.14

어린 시절의 가장 큰 착각은 행복과 밝음에 대한 오해였던 것 같다.

잘한다면, 좋은 방향으로 간다면 나는 늘 충만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악마들이 알려준 잘못된 판타지였다.

아프지 않고 기쁘기만 한 것에는 의미가 깃들지 못한다. 진실에는 부재가 담기지 않는다.

잘못된 믿음을 쫓으며 진실의 눈을 가리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