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그들은 본질적인 것에 대해 물어보는 법이 없다.

어린왕자

나는 투자를 하면서 숫자를 많이 본다.
사실들은 여러 갈래의 여러 부분에서 서로 얽혀있고, 그 결과는 기업의 실적이라는 이름을 꼬리표로 붙여 숫자로 드러난다.

스캘핑을 할 때는 숫자를 절대적으로 믿었고, 중장기 투자를 하는 지금도 숫자를 끼고 산다.
숫자는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인간 기준의 자로 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의 길이는 이 만큼입니다.”라고 결론을 내어버리면 알 수 없는 것을 알게된 듯 맘이 편하다.

그러나 그것은 빗나간 궤도의 오차가 점점 커지는 것만큼이나 그릇된 반올림에 가깝다.
하나의 세계는 다른 세계를 완전히 대변할 수 없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의 본능은 세상 여기저기를 사포로 갈아내어 틀에 박으려는 무모한 시도를 한다.

경향성에서 규칙을 찾아내려는 이 폭력적인 시도는 세상을 그럭저럭 굴러가게 해주는 고마운 도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처럼 개별의 문제는 전혀 다르다.

나는 이에 관해 ‘모든 개인적인 일에는 다양성이 있지만, 경향성에는 원리가 있다.’라고 정리하고 싶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원래부터 숫자를 좋아했던 것인지.
어쩌면 나이를 먹어가면서 숫자에 익숙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단지 호기심을 잃은 것일수도 있다. 숫자는 익숙하고 새로운 일들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나는 모든 일들을 개별적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 일들이라는게 멀리서 보면 대게 비슷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모두 다르다.

스스로가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에 대해 모르고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일에 관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아는 것이 많을수록 그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숫자보다는 시를 좋아하는 낭만의 시대를 살고 싶다.

선택에 관한 생각

저는 주어진 것들을 자원으로 치환하고 가치판단 문제를 다루기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즉 시간, 에너지, 돈 등도 자원이라고 생각하고 선택을 합니다.
각 자원마다 조금씩 그 특성이 다른데 시간은 신축성이 없고 한정적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에너지는 클수록 좋은 편이지만 그 관리에 섬세하게 신경 써야하고, 돈은 다른 사람의 시간및 에너지와 교환할 수 있는 유용한 재화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할 수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 관리나 To Do 그리고 궁극적인 인생의 가치 판단에 이르기까지 결국은 선택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오늘 하고 싶은 얘기를 경제적으로 서두에 밝히자면,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를 결국 모든 것을 다 소유하거나 체험할 수 없고 가장 좋은 것들을 추구해야 된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더 좋지 못한 것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배제해야 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는 우선 우리가 소유한 시간이 한정적이라는 중요한 사실에 입각하는데,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보통의 우리들이 시간을 삶을 살아가는데에만 쓰지않고 시간을 노동에 투입해 돈과 교환함으로써 삶을 살아내는데에도 많은 비중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일에만 시간을 쓰라는 이야기는 글로 적거나 말로 하면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별로 즐겁지도 않을 게 뻔해보이는 영화를 본다거나 만남을 한다거나 하는 식이죠.

우리의 물리적 실체도 한정적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활기차든 머리에 담을 수 있는 생각은 한정적입니다. 뉴런의 연결을 아무리 늘려도 여러 곳을 동시에 만족스럽게 활성화 시킬 수 없습니다.
시간이 한정적이고 그 시간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도 행동도 크게 개선할 수 없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할지 신중해지는 것입니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효과적인 것이 효율적인 것보다 낫습니다.

일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야 되는지 잘하는 일을 선택해야되는지 묻는 게 유행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예전만큼 자주 묻지 않습니다. 단지 유행이 지난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개인들의 직업. 즉, 일이 전보다 자주 바뀌고 이직이 활발해진 것도 영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일을 하다가 전혀 다른 필드의 일을 하는 경우도 전보다 많아지고 있죠.

저도 어릴 때는 위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던져보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바보같았던 것 같습니다. 질문 자체가 조금 바보 같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일로 하면 싫어하게 된다는 얘기도 많지만 일로 하지않아도 그냥 싫증이 나고 관심이 덜해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좋아한다는 정의를 유쾌하다는 감정으로 이해할 경우에는 말이죠. 반면 좋아한다는 걸 어떤 목표와 정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일이 조금 고되진다고 해서 그 마음이 변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반대로 잘하는 일은 계속 잘할 수 있는 걸까요. 아니면 그 일을 잘하는 사람은 다른 비슷한 일도 잘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보수와 환경이 괜찮은 일로 계속 바꾸는게 낫지 않아요?
질문의 사전적 정의가 명쾌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과거의 직업 노동 시장은 어떤 식으로 형태가 고착화되어있는 직업들이 있고 그것들 중 하나를 선택해 오랫동안 거기에 몸 담고 일해야만 했던 시대에 생각의 기반을 두고 담론이 이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빠르게 와해되고 있습니다. 모든 직업군이 그런건 아니지만, 또한 그걸 안정성이라는 이름 아래 지켜내려고 하는 직군들도 있지만 좋기만 한 일은 없습니다. 억지로 만들어놓은 한쪽의 안정이란 다른 쪽의 불안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올려놓은 의자 같은 것이니까요.

말이 옆길로 많이 샜지만 결론을 정리하자면
저는 각 개인이 돈을 버는 일의 종류를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계속 변화하면서 그때 그때 최적의 일을 찾는게 감정적이나 보상에 좋다고 생각하고 그걸 능동적으로 추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원치않아도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니 나를 먼저 그 앞에 데려다 놓으면 편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인생을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정답이나 공략법 같은 것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나은 것과 나은 것 그리고 나은 것 하나를 내 곁에 더 잡아두기 보다는 가장 나은 것들로만 내 삶을 채우려고 노력하고 나머지 것들을 미련없이 두고 가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230321

삶에서 중요한 건 태도라는 생각을 했다.

좋은 결과를 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어떤 목표에 투신한다는 것은 자신을 잊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지만, 좋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한 개인이 자신을 완전히 경주한 일의 나쁜 결과를 받는 건 꽤 아픈 일이고, 반대로 그 목표에 겨우 닿아 올라선 뒤의 공허함은 상상외로 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영원히 가득 채울 수 없고 얼마간의 여백은 더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고 항상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을 달래 줄 새로운 목표를 세우거나 그냥 바보같이 멈춰 서 시간을 하염없이 태울수도 있다.

누군가는 한 평생을 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눈을 가린 경주마와 무엇이 다를까. 내일을 갖기 위해 포기한 오늘들은 정신없이 달려온 과거만을 비추어줄 뿐이다.

행복은 즐거운 마음의 합이라는 생각을 했던 때도 있었다.
뭔가를 하면, 뭔가를 가지면 그것들이 계속 쌓여서 만족스럽기만 하루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행복하기 위해 채운 것들은 거짓말처럼 거추장스럽고 갈증만 불러왔다. 반면 아무 기대도 없이 세상을 통해 받은 것들은 아무리 사소한 것들이라도 간직할 만한 것들이 되었다.

우리가 꼭 무언가가 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건 대게 시간이나 노력 혹은 다른 자원의 문제고 결국 뭔가가 된다해도 그뿐이다. 삶이 이야기를 통해 만들어준 개인적인 의미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짜 의미를 유행처럼 만들어 쫓고 있는 것 같다.
경험이나 소유도 같은 문제다.

인생은 있지도 않을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믿는 것을 엄격하게 고르고 그것을 관철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오늘의 내가,
원하는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태도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사람이 투자자가 되는가

그동안 투자에 관련된 글을 참 많이도 적었지만 대부분 나만의 기록으로 숨겨뒀습니다.

사실 시장에 늘 참여해 있는 전업투자자의 입장에서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감정적 유희를 목적으로 하는 이외의 특별한 장점은 없어 보입니다. 어차피 시장을 통해 결과물을 어떤식으로든 받아볼 것이고 그 결과의 밀도가 다른 여타 일들을 통해 맞이할 결과보다 높기 때문에, 전업투자자라면 다른 짓을 할 시간에 자신의 일에 한번 더 집중하는 편이 백번 낫습니다.

오히려 종목이나 투자에 대한 생각을 공개하는 것에 단점은 무수히 많은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터 제 생각은 대중들의 의견과 괴리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 생각들은 대게 인기가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제가 믿었고 결과적으로 맞았던 관점을 가지고도 제 지인들 대부분은 좋은 투자 결과를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투자란 단지 특정 아이디어만 가지고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시장이 움직이는 모습에 대한 금융공학적인 이해, 자신에 대한 믿음, 계속 추적하면서 오래된 내 생각조차 파기할 수 있는 치열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주제를 한정하여 이 이야기는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스스로 오래 고민해보기도 했고, 오랜 지인들에게 받았던 질문들은 대부분 이런 생각의 변형인 것 같아서입니다.

최근에 친구들로부터 들은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투자를 계속 한다는 건, 너는 괜찮다는거야?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고통스럽지 않으니까?”
“생활비는 어떻게 해? 어떻게든 계속 이익을 보나?”

일단 저는 이제 만7년을 넘기고 있는, 투자만을 통해 살아가고 있는 개인 전업투자자입니다. 그 모든 기간동안 스스로가 전업투자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일을 하지 않고 투자만으로 생계를 유지한 것은 사실입니다.
처음 투자를 시작할 때는 좋은 종목을 찾았다고 생각했고, 짧게 돈을 벌어 자산을 불린 후 다른 일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여러 경험을 통해 스스로가 전업 투자자라고 생각하는 오늘날이 되었습니다.

일단 시드가 얼마였는지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저는 대학을 다니는 20대 초반부터 학업과 병행해 일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돈을 벌기 시작했고 거기에 운도 닿아 20대 중후반에 억대의 시드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이 일 저 일 경험 상 알바도 해보고 사업에 발을 한 발 넣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업 아이템을 찾던 중 상술한 것처럼 좋은 종목을 발견해 사업을 진행하기보다는 기업에 투자를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한 종목을 통해 저는 몇가지 경험을 하게되었는데, 흔히 몇 배의 수익을 보는 것을 말하는 몇 루타를 쳤고 / 차트의 제일 바닥에서 주식을 던지는 항복 매도를 경험했으며 / 그 후 해당 종목이 완전히 다른 궤도에 안착해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경험을 했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직장인 연봉 몇년 수입 정도인 수 천만원 정도의 금액으로 투자를 계속하게 되었으니 시드가 대단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주식 커뮤니티를 읽다보면 시드가 얼마나 되어야 전업투자자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종종 보이기에 적어보았습니다.
저는 시드는 전업투자자라는 일을 선택하는데 중대한 고려사항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느 정도 뭉터기의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첫 투자의 경험 이후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고통과 복수심, 환희와 좌절 그리고 분노, 공허함등 참 많은 감정을 널뛰었던 같습니다. 다양한 감정적인 경험이 저라는 개인의 중요한 본질을 바꿔갔습니다.
투자를 하기 이전에 저는 스스로가 대부분의 사람보다 이성적이고 효율적으로 일들을 처리해낼 수 있다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장은 제가 얼마나 나약하고 정서적으로 취약한 사람인지 여과없이 보여줬습니다.

첫 투자의 확정 손실 금액이 만만찮다보니 저는 초반 몇 년을 스캘퍼로 생활했습니다. 시장의 유통되고 있는 정보나 저라는 사람의 사업 분석에 대한 이성적 판단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직하게 공개되어있는 가격과 거래량에 기초한 짧은 트레이딩만이 진짜 실력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고됐습니다만 결과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시장에 복수했고, 그 다음에는 그 성과에 기초해 그냥 조금 더 남아있어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단기 트레이딩을 그만둘 때까지도 좋았습니다. 다만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제 몸의 보상 체계가 거의 완전히 망가졌다는 사실을 인지해 시장에서 나왔습니다. 하루는 친구들을 만나 식사를 하는데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고 음식의 맛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밍숭맹숭해서 도파민 중독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는 첫 종목의 트라우마로 단기 트레이딩을 하면서도 작은 분량으로 쪼개고 대신 엄청나게 많은 자리를 거래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최대 손실 2% 내외로 놓고 거래했습니다. 달리말하면 노동량과 자산 회전률이 엄청났습니다. 당시 어딘가에서 보았던 통계에서 제 한달 거래 금액이 개인투자자중에서는 최상위의 거래금액이었으니 참 열심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 전체와 돈을 트레이드오프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 후에는 온갖 종류의 투자에 다 손을 대 보았습니다. 부동산 투자 외에 합법적인 알려진 대부분의 투자 방법에 제 돈을 직접 넣어 스킨인더게임을 실천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선물 옵션을 통해서는 공포와 거대 자본의 전략을 배웠고, 온갖 액티브 및 ETF를 통해서는 그들의 무능함과 부도덕함에 실망했습니다. 비상장 주식을 통해서는 환금성의 중요성을, 시장에 나왔던 여러 상품들을 통해서는 인기 경합 상품들이 얼마나 눈 먼 돈을 노리는지 배웠습니다. 퀀트 전략은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시장에 기계들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커지고 있는지 생각할 기회를 줬습니다.

제가 이런 경험들에 제 돈과 시간, 에너지를 투입했다고 해서 앞으로의 투자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아마 이런 경험들을 하지 않은 분에 비해서는 미약하게라도 생존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해보고 싶으신지요?
자신의 돈을 충분히 잃어보고 싶으십니까, 충분히 고통받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고민해보고 싶으십니까?

아마 과거의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면 저는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매번 제 앞에 있는 길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번듯한 직업을 가진 친구들이 물을 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가 이전에 충분히 노력해서 잘 하게 된 일들을 가지고, 투자라는 새로운 일에 너무 많은 기대와 자원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본업을 더 잘하는게 더 나은 투자일 가능성이 높아.”

저는 이미 시장에 많은 자원을 투입하였고 어느정도 그에 적합한 종류의 인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지, 제가 겪었던 일련의 과정을 아끼는 타인에게 겪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 최소의 노력으로 대부분의 경쟁자를 상회할 수 있는 인덱스라는 상품이 있는 상황에서 타인에게 투자를 강요하는 것은 어떤 악의나 무지가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똑똑한 친구들에게는 한 마디 덧 붙입니다.
“아직 잘 모르니까.. 시장에서 네 능력 범위를 실험해보고 싶으면 잃었을 때 어느정도 아프지만, 그래도 네 인생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을 1~2년 정도면 모을 수 있는 자금으로 아주 장기적으로 배운다는 관점으로.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봐”

자기는 전업투자자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추천하지 않는다니, 재수없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변을 해보자면 지금의 저는 이 일을 아주 진지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여러분이 일확천금이나 자산을 퀀텀점프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서 투자를 하려는 것과는 바라보는 지점이 조금 다릅니다. 저는 이 일을 평생에 걸쳐서 해보고 싶습니다. 단기 트레이딩을 넘어서 중장기로 기업에 투자하는 일은 제가 세상을 배우고 관심을 지속하게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거대한 지적 게임을 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운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모르는 것들을 정의하고 위험을 피하고 아주 소수의 아는 것을 발견해서 제가 옳았다는 것을 시간과 인내로 증명해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하기 어렵습니다.

전에는 역사책을 읽거나 인지심리학 책을 읽는 것이 단지 자기 만족의 일종에 불과했는데 그런 정보 탐색과 사색의 시간이 내 일이라고 정의해버리는 제 멋대로의 만족감도 있습니다.

즉 저는 수 많은 직업들 중에서 저라는 인간에게 적합한 투자자라는 직업에 도달한 것 뿐입니다. 저는 부자도 아니고 매일 매일 놀지도 않습니다. 시간을 제 멋대로 계획해 쓰기는 하지만 매일 지독할 정도로 많은 량의 정보를 소화하며 사색의 시간을 가집니다. 어찌보면 대부분의 직장인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나름 잘해내고 있고 천성에 맞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어려운 부분도 크지만 그것들은 지난 시간을 통해 많이 배웠고, 앞으로도 더 배워나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둘러보면 누구나 반드시 직접 투자를 해야할 것 처럼, 우리가 누구나 옷을 입듯 투자도 그렇게 정해진대로 하면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키가 큰 사람은 축구보다는 농구에 더 유리하고, 몸집이 좋은 사람은 힘을 쓰는 일에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본디 활자에 미쳐있는 종류의 인간은 이런 일에 더 적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230224

자진해서 한계지점에서 머무르자라는 생각 한 토막

부끄러움을 모르는 하루는 안전지대로 도망친 하루다. 그것이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을 살아내지 못한 하루에 부끄러운 마음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은.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많은 일들이 내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또한 없었다.

겸손이나 인내라는 것을 안전한 곳에서 떠올릴 때는 추상적이고 고요한 것이지만, 실제 곁에 둘 때는 격정적인 감정의 파고와 함께 하는 것이다. 겸손은 비통함이나 경외심 뒤에 오고 인내는 아픔과 함께 온다.
자신의 삶이 어려움없이 평화롭다면, 단지 겸손과 인내를 흉내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덕목은 늘 손아귀에 쥐고 있을만큼 가벼운 종류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알몸으로 수영하고 있는지는 파도가 빠져나가야 알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는 파도가 친 뒤에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일이지만 일신의 아늑함에 숨어들은 자신을 과대평가해서도 안된다.

현실은 계속해서 변하고 자기 자신도 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은 삶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자진해서 벌판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젊은 시절에는 너무 뜨겁게, 나이를 먹어서는 너무 차갑게 살아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이를 먹어서 자신이 세상을 잘 다룰 줄 알게 되었다고 혹은 지혜로워졌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는 편향된 생각이 아닐까 한다.

사람은 무언가를 얻으려는 것보다는 나쁜 감정을 회피하기 위해서 동기부여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이를 통해 생각해보면 젊은 날에 한계를 훌쩍 넘어 서 버티는 것은 되고자 하는 자신에 대한 열망 그리고 현실 속 자신과의 차이를 피하려는 두가지 마음의 혼재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둘 중 하나만 생각한다면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이가 들어 더 쉬운 길로 가려는 자신은 정말로 세상에 요령이 생기고 효과/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낸 것일수도 있지만 단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음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오랜 시간 혼란스러웠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돌이켜보면 너무 뜨겁기만 한 것도 답은 아니었다. 운동을 하면 너무 몰아붙여서 다치기 일쑤였고, 일을 할 때는 지나친 과로로 몸이 상해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그건 어떤 발바둥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 지금은 더 나아졌을까.
돈과 시간에 여유는 생겼지만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게 나 외의 세상에서 절대적인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은 아니니까. 적당히 하는 것들이 올바른 처신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가끔씩 뜨거운 마음이 생겨서 내 한계지점을 벗어났을 때는 벌거벗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한동안은 몸이 늙어도 사람의 마음은 쉽게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나이를 들어감에 따라 가장 주의해야 할 일은 마음이 늙는 것일지도 모른다.

충분히 만족한다고 해서 적당히 살지는 말아야겠다.
충만한 삶은 만족감을 불러왔을까. 사람의 마음은 결코 영원한 행복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더 많이 채우려 하기보다 자신의 영역을 넓혀서 기쁨의 종류와 빈도를 높이고 동시에 불편함을 감수해 만족의 역치를 낮추는 현실적인 결론을 따라야 한다.

물론 어린 시절에 했던 실수를 그대로 답습하고 싶지는 않다. 경험은 사람을 더 나아지게하는데 쓰여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계지점을 넘어서려고 맹목적으로 달려나가기보다는 나의 한계지점을 찾아서 그 경계선에서 머무르는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뜨겁고 차가운. 조금은 경험적이고 모호한 답이지만 모든 일에 통하는 원칙이란, 단지 모든 일들은 개별적이라는 것이다.
한계 지점에 서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지켜보고 다시 다음 한계선에서 넘을 듯 말 듯 위태롭게 서서 버티는 방법만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답은 항상 기본에 있고 진부하다. 경험이 중요한 것은 기본에 충실하도록 몸에 기억이라는 흉터를 새겨주기 때문이다. 타인의 경험을 통해 새긴 글귀는 쉽게 지워진다.

230123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고민을 너무 오랫동안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많은 종류의 고민들은 이미 물어보았고 답을 내렸기에, 비록 만족스럽지 못한 답이라도 그저 묵묵히 믿는대로 따르면 그 뿐입니다.

최근에 많이 하는 생각은 모든 것을 기적으로 바라보는 가치관입니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자연스럽다고 표현합니다. 자연이 그대로 있었고, 우리는 그에 익숙해졌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우연히 그 모든 것에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만약 내가 물이 필요하지 않는 생명체라면, 물이 필요한 존재를 보면서 얼마나 기이한 맘을 품을까.
왜 우리는 다른 생명을 섭취하는 괴상한 의식을 통해 하루를 연장하는 구조를 갖게되었을까. 왜 세계가 이렇게 독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음에도, 어떻게 우리는 그것들을 당연하게 받아 들일 수 있는 황당무계한 사고를 부여받았을까.

이런 생각이 한번 뿌리를 내리면 세상의 모든 것이 기이하고 놀라워집니다.
그 모든 우연. 제 머리로는 셈할수도 없이 끝없이 펼쳐진 가능성 위에 놓인 한 점의 현실.

하나의 삶이 소유한 작은 시공간에서 가장 멋진 점은 우리가 자유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쫓는게 무엇이건. -믿는 것, 부여된 혹은 만든 의미나 이야기 –
심지어 자유라는 건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포기하는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말도 안되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을 빌려쓰고 있다는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은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제일 먼 곳까지 날아갑니다.
어쩌면 불가능했을 그 모든 것이 있었고, 있을테니까요.

내일이 되면 또 다시 인간적인 문제들이 삶을 가로막고, 오늘을 위한 문제들로 눈을 가릴 것을 압니다.
해가 뜨면 해야 할 일을 해야하고, 미래를 오늘로 가져오기 위해서 사람이 만든 규칙안에 내 몸과 마음을 끼워 맞출 것을 압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라는 한 점이 여전히 말도 안되는 기적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마음만은 어디에도 쫓기지 않고 내가 원하는 나로 존재 할 수 있습니다.

삶은 기적이라는 말로 남을 위로하거나 설득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좋지 않은 점은 사는 것보다 죽는게 합리적일수도 있는 현실을 만나서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삶이 개인에게 허락한 것은 그런 곤경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도움을 주고, 그런 불운을 만난 자신을 세상이 돕도록 청하는 것뿐입니다. 그런 현실적인 한계 속에서 누군가는 타인보다 더 가혹한 세상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제가 여전히 불가지론자로 남아 세상을 쏘아보는 이유입니다.

낙관주의자가 저를 설득할 수 없듯, 우리도 세상이 모든 면에서 평평해지도록 설득할 수 없습니다. 차면 기울고, 기울고 나면 다시 차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기이하게도 말이죠.

그럼에도 저는 또 생각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놀랍고 이해할 수 없다고요.
이 자연스러운 생각은 그 어떤 모순에도 불구하고 저를 인간적인 문제들로부터 떼어내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이는 자연의 경이에 비하면 인간이 만든 퍼즐이 너무도 작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세상의 경이를 보고 있으면, 누군가의 마음이 당신을 해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자기 자신일지라도요.

늦은 첫 코로나 후기

23.01.09 (월)
월요일 밤 자려고 누웠는데 목이 살짝 잠겼다.
코로나가 생긴 이후 마스크를 쓰고 생활을 한 덕에 흔한 목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기에 조금 싸한 기분이 들었다.

23.01.10 (화)
낮에 이상할 정도로 피곤해서 뜨거운 물로 씻고 나왔는데, 갑자기 오한이 찾아왔다. 요즘 코로나는 기관지가 안 좋아진다는 말만 들어서 코로나는 아니고 유행하는 독감에 걸린게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저녁 무렵까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자가검진키트를 이용해 검사해봤다. 처음에는 음성으로 나왔는데 1시간이 훌쩍 지나 다시 살펴보니 T자 부분에 보일듯 말듯한 두 줄이 표시되어 PCR 검사를 받고 왔다.
살짝 열감이 있어서 이부프로펜이 들어간 경구용 감기약을 먹고 잤다.

23.01.11 (수)
오전에 확진 문자를 받았다.
은연중에 예상했던지라 일상적으로 아침을 먹었다. 이때부터 체온을 재기 시작했는데 식 후 1시간 정도 지나니 39도를 넘어섰다. 어제 먹었던 이부프로펜이 들어간 감기약을 먹고 한 숨 자고 일어났다. 37~38도를 왔다갔다했다.
이 날은 온도 조절이 안되서 끼니때마다 감기약을 한 알씩 먹었다. 비타민B, D, 아연도 먹었다.
오한이 찾아오면 전기장판 깔고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잤다. 자고 일어나면 땀이 흠뻑 났는데 이러면 잠깐씩 체온이 적정수준으로 돌아오고 다시 일어나 있으면 온도가 오르고 다시 잠깐 자고를 반복했다.

23.01.12 (목)
잠을 너무 많이 잔 탓에 아침 일찍 깼다. 잠깐 스트레칭을 하는데 속이 뒤집히는 것처럼 갑자기 역함이 밀려와 구토를 할 뻔 해서 다시 누웠다. 다행히 체온은 37도 초반에서 유지가 되서 약을 안 먹어보기로 했다.
오후가 되니 체온은 36.x~37.x 수준으로 안정됐다.
저녁 무렵부터는 목이 엄청 아팠다. 열이 안나서 이제 계속 나아지겠구나했는데, 침 한번 삼키기가 어려울 정도로 아팠고 밖에서 만져도 목이 뜨끈뜨끈할 정도라 그 여파로 두통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코가 막히고 침을 삼킬 때의 통증 때문에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일어나 물 한컵 먹고 쉬다가 잠깐 자고 일어나 물 마시고 잠깐 자는 식으로 밤을 보냈다.

23.01.13 (금)
7시쯤 다시 잠에 들어서 11시쯤 일어났는데, 놀랍게도 목의 통증이 덜했다. 침을 삼킬 때 불편한 정도는 같은데 싸한 느낌이 줄었다고 해야할 것 같다.
그런데 점심을 먹다보니 맛이 잘 안나는 걸 알 수 있었다. 혹시나해서 다른 자극적인 음식, 간식들도 먹어보아쓴데 확실히 맛이 잘 나지 않았다.
목의 통증은 줄었지만 발작적으로 나는 마른 기침은 오히려 늘었다.
이제 관리만 잘해주면 이번 코로나는 큰 무리없이 잘 지나가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23.01.14 (토)
오후쯤 되니 귀신같이 침을 삼켜도 목이 아프지 않음.
목이 간지러워서 마른 기침은 하지만 갑자기 나오는 기침도 줄었음.

Meta Quest 휴대폰 앱에서 기기가 사라졌을 때 다시 페어링하기

  • 증상 : 메타 퀘스트 휴대폰 앱의 기기 목록에서 내 기기가 갑자기 사라진다. 퀘스트를 PC와 연결했을 때 이런 경우가 발생했는데, 한번은 사이드 퀘스트를 유선으로 연결했을 때였고 다른 한번은 에어링크로 연결한 뒤였다. 결론적으로 앱을 실행시키면 UI가 기기가 없는 상태로 변하고 몇몇 기능이 작동되지 않음.

  • 해결 : 퀘스트를 쓰고 설정 – 정보에서 다섯자리 페어링 코드를 기억해둔다. 그리고 앱을 열어 새기기 추가 버튼을 누른 뒤 해당 페어링 코드를 넣는다. 연결되지 않으면 휴대폰의 블루투스를 껐다가 다시 켜준다. 이 방법을 알기전에는 기기를 몇번이나 포맷해야 했기 때문에 불편했다.

Obsidian을 탐색기 db처럼 이용하기

이번 블랙프라이데이 할인으로 Directory Opus를 구매하려다가 Obsidian를 파일 관리자처럼 이용하는 방법을 고민해봄. 참고로 Directory Opus에서 원했던 기능은 모든 파일에 태그나 주석을 달 수 있고 그걸 필터로 검색할 수 있는 점. 이를 obsidian으로 할 수 있다면 다른 기능은 Total Commander와 Everything, Fast Stone등으로 필요할 때 맞춤해서 사용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Obsidian의 각 노트는 *.md파일로 이뤄져 있으며 md파일의 묶음인 Vault는 꼭 지정폴더에만 둬야 하는게 아니라 내 컴퓨터의 아무곳에나 두고 읽어올 수 있음을 활용함.

  1. Obsidian을 켜면 좌측 하단의 아이콘 메뉴 중 제일 위 ‘다른 저장고 열기’를 통해 관리하고자 하는 종류의 Vault를 만들고 연다.
  2. 설정 – 파일 및 링크에서 ‘새 첨부 파일을 만들 위치’ 옵션을 현재 파일과 동일한 폴더로 바꿔준다.
  3. 노트를 만들면 해당 제목과 동일한 폴더를 만들고 해당 노트를 폴더의 하위로 둔다. 이는 이미지나 pdf등을 노트에 첨부할 때 해당 파일의 관련 노트의 폴더로 이동되기에 윈도우 탐색기 및 서드파티 탐색기에서 관리하기 용이하기 위함이다.
    예) obsidian 폴더 – obsidian 노트
  4. 그 외에 추가적인 기능은 각자 Obsidian을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커스터마이징하면 된다. Obsidian의 노트파일을 일종의 db처럼 이용하는데 주요하다.

위의 방법을 이용하면 영화 폴더에 옵시디언 노트 파일을 둠으로써 리뷰나 자료 해석. 그리고 원하는 장르 검색에 용이하고, 개인적으로는 여러 공부를 할 때 pdf파일 및 기사나 인포그래픽등을 통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에는 맘에 드는 유튜브 영상들을 보고 여러 태그나 정보 해석을 달아 리뷰해놓는 경우가 많았는데 다른 유형의 파일 정보들과 통합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위의 방식으로 노트를 사용한지 며칠되지 않아서 좀 더 사용 후 업데이트 해 볼 예정.

221003

불편함에 대한 예민함, 편안함에 대한 무뎌짐, 망각 이 세가지 때문에 인간은 우리가 행복이라고 상상하는 것에 영영 도달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먼저 살았던 생각이 깊은 사람들이 단지 마음의 평화가 행복이라고 주장한 까닭이 이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이 짜증스러웠고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그 평화라는 것이 생각보다 더욱 더 도달하기 힘든 것인 것에 반해 보상이 너무 적은 것처럼 여겨졌다.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을 만들어 이런 세상에 가둬둔 것들은 얼마나 심보가 고약한 놈들인가 생각을 하다가
반대로 결국 이런 모순에 갇힐 정도로 미묘하게 모순적인 존재들만 지금 이 세상에 살아남은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똑똑하거나, 더 미련하거나, 더 감정적이거나, 더 아둔하거나 이런식으로 조금이라도 더하거나 덜한 존재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것 같다.

그럼에도 남겨진 유일한 것은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인 것 같다.
자유가 실존하던 그렇지 않던 우리는 그렇다고 믿을 수 있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를 행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원시적은 사회에서는 힘이 그것의 기반이었고, 사회에서는 결속력이 미약해 듬성듬성한 울타리 같은 룰이 그것을 대신한다.
이성이라는 것이 주어졌으므로 다른 존재의 자유 역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보면 자연은 무질서한 엔트로피로 향해가고, 이성은 정리하려는 강박을 가진 인간의 감옥인 것 같다.
그럼에도 나라는 질서를 가진 하나의 개인 존재는 그것을 감내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질서를 부여하려는 마음이 인간의 숙명인 것 같다.

세상 속에서 계속 삶을 따라가는 것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유연하려고 하고 나와 같이 이런 불합리한 여행을 하고 있는 다른 존재들의 마음을 어렴풋하게 상상해가면서 그냥 살아가는 것 뿐이다.
다만 마음은 거창한 무엇을 향하는 게 아니라 눈 앞의 이야기와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는 걸 잊을 때마다 상기할 수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