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16일

상을 치르고 왔다.

직계 가족의 상을 치른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성인이 된 뒤 상주의 격식을 차려 상을 지낸 것은 처음이었다.
많은 일들을 더 큰 어른들께서 진행하셨지만 이번 한 주일이 몇 년처럼 두꺼운 밀도로 내 삶을 채웠다.

상 중에 한 어르신께서 나지막이 호상이라는 말을 내게 해주셨다.
우리는 평소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연명 치료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소 마스크조차 떼어내려 하시는 손길을 부여잡으며 그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
때문에 그 단어에 깊은 이질감이 느꼈다. 하지만 따로 소리내어 고치지는 않았다.

꼬박 이틀동안 천 여명의 손님을 받았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식사값이 그에 준하였다.
지친 몸에 장례식은 산 사람을 위한 행사라는 뾰족한 마음이 들었으나, 절하고 또 절했다.
우리는 사람에, 술에. 그리고 이 일련의 장례 절차에 취한 것 같았다. 슬픔을 무언가로 태워 재로 화하여야만 했다. 끝없이 절하고 쪽잠을 자는 것이 조금이라도 우리의 슬픔을 승화시켜나갔을 것이다.

아직 학교도 가지 않은 조그마한 사촌 동생들은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갔다며 방방 뛰었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다혈질인 우리 가족답게 서로를 끌어안고 위로하는 와중에도 종종 싸웠다.
그러면서도 진심으로 의지했다.
그것을 보면서 삶의 모든 것이 미묘하고도 깊숙하게 엉켜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내가 삶의 다음 이면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정도의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로 몇 해가 지나자 꼭 갖고 싶은 것이 없게 되었다. 큰 부자는 아니나 욕심쟁이도 아닌 것 같다.
그 후 몇 년은 하고 싶은 것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이 역시 시간이 지나자 꼭 해야만 할 도전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걸 못해서 진정으로 후회할까? 라는 게 딱히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에 대한 애착같은 것이 생긴다.
물론 그와 동시에 타인에 대한 실망과 공포도 늘어간다.
그래서 나는 선량한 사람들을 그리도 찾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상을 치르며 내게는 가족과 사람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뿌리 깊게 인식하게 되었다.

장례식 중 단 한번 할아버지께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울음을 밖으로 꺼내셨다. 굳게 잠가놓은 단단한 마음조차도 입관 말미에는 슬픔이 부풀어 새어나오고야 만 것이다. 나는 아내를,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헤아릴 길이 없었으나 그 슬픔의 작은 단면에도 가슴이 시리었다.

발인을 하고 삼오제를 지냈다.
지금은 여느때와 다름 없이 내 방에 앉아있다.
변한 게 없는 것 같지만 마음이 헛헛하다. 그 자리에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을 하늘이 거두어 가버렸다.

아무것도 추억하지 않는데 눈물이 난다.
슬픔 또한 내 것이니 이제는 이것을 추억할 것이다.

2017.08.03

가끔 생각한다.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생각은 익숙한 쳇바퀴 위에 훨씬 더 익숙한 스스로의 발자국을 눈 여겨 밟는다.
잠시 멈춰 서 생각하겠지.
그리고는 익숙한 생각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힘을 내 달릴 것이다.
오랫동안 간직해 온 답이다.

그럼에도 마음에 그린 스케치의 한 획을 지날 때마다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이렇듯 또 하루가 갈 것이고 존재는 채워지지 않는다.

실은 항상 생각한다.

어디로든 가야된다고.

다름과 틀림

다름과 틀림.
다름은 인정하고 틀림은 인정해서는 안될 것이지만 난 여전히 이 둘을 구분하는 차이를 잘 모르겠다.
둘 사이의 구분선은 영원히 끝에 닿지 못하는 듯하다.

우리는 항상 갈등을 마주하고 어떤 식으로든 선택하면서 나아간다.
나와 생각이 다른 누군가를 대할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옳다고 정해진 것은 애초에 없다고 생각한다.
좋은 것이란 사건에 관여된 사람들이 모두 웃을 수 있는 선택이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좋다면 나를 속이고 상대를 속여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틀린 것이라 생각되더라도 내가 쉬이 털어낼 수 있는 정도이고, 관여된 타인들에게도 좋은 것이라면 양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스스로를 속이는 과정에서 숙고하여 정해놓은 가치관까지 침해당해서는 안된다.

이런 사회의 기술들은 나름 현명하다고 여겨진다. 행동화시키려 노력해볼만하다.

하지만 양립 불가한 문제들도 있다. 많다.
우리는 선택을 해야한다.
칼을 들어 한 쪽을 더 베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 일에 서투르다. 사실 그 누구라도 이 일을 평화롭게 처리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뻔한 얘기겠지만 대다수의 개인이 이런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은 자기 방어, 무시, 기만 정도로 나뉘는 것 같다.
나 역시 무분별하게 위의 대응 방식을 섞어 사용하며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는 그저 끝이 없는 이유를 대며 나의 주장을 관철시킨다. 사실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말 역시 옳다는 걸 인정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휴전 내가 겸연쩍게 내민 화친에 손에 상대가 응해줬을 때만 가능하다.

가끔은 이 대화가 하기 싫어 화제를 돌리기도 한다. 문제가 너무 복잡하여 생각하기도 싫고 이렇다할 결정도 내지 못할 것 같다. “너는 그렇구나.”라고 대답하기는 하지만 해당 문제에 대해 나의 관점이 나아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서 물러설 수 없는 일에서는(주로 개인의 이득을 위해서) 비겁한 기만을 하기도 한다. 옳고 그름에는 관심이 없다. 상대를 옆에서 어르고 뒤에서 놀래키며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한다. 많은 비지니스 관계가 이럴 것이다. 일을 교우 관계처럼 진행시키는 사람은 언젠가 기만스런 늑대를 만나서 호되게 당하는 날이 있다. 정치공학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자기 방어, 무시, 기만 모두 싫다.
실제하고 그때 그때 쓸모가 있는 방식일 수 있겠으나, 순전히 개인적인 기호로 싫다.
자기 방어적인 태도는 감정 과잉적이며 관계를 파탄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무조건 버려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소리다.
무시는 종종 능수능란하게 사용될 수 있으나 자기의 관점을 더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이런 태도는 순전히 피상적인 인간 관계에서만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기만은 너무도 사익에 치중한다고 여겨져 싫다. 살다보니 상황이라는 톱니 바퀴의 맞물림을 살짝 바꾸어 교묘히 이득을 보는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싫었다. 내가 남들과 다른 직업을 선택한 가장 큰 두가지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평소 생각이 많기 때문인지 나는 정치 공학적인 전략을 짜는데 능했고, 본의 아니게 자기혐오를 느끼는 순간도 있었다. 결국 이런 태도는 삶을 승리자가 없는 전쟁터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내가 지향하고자 하는 태도는 아래와 같다.
쉬이 결정을 내리기 힘든 문제에 관해 내가 가진 의견이란, 내가 가진 가치관과 정보를 기준으로 내린 최선의 것일 것이다. 늘 해당 시점에서 최선의 것이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늘 최선의 것이 아닐 것이 거의 확실하다. 정보는 불완전하며 가치관은 개인적인 것이다.
즉, 나는 스스로의 의견이 내가 아는 한 최선의 것이라고 여기면서 동시에 이것이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명확한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틀릴 줄 알면서도 자신의 의견에 정직해야하고, 자신의 잘못을 알았을 때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아야하며,  잘못된 것들을 고쳐 새로운 것을 세울 용기를 가져야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담백하게 주장하는 태도와 겸손한 마음을 항시 간직해야한다.
글을 적으며 돌이켜보건데 이런 태도를 가진 친구가 내 곁에 몇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고맙다.
혹시 벽창호를 만난다면 한 마디도 더 섞지 않는 걸(무시) 추천한다.

이런 글을 적어놓고 있는 나는 여전히 자주, 많이 틀린다. 그 점이 나를 괴롭힌다.
하루 중 즐겁고 보람찬 일들이 참 많지만 좋은 일은 추억에 묻고 이렇게 우울한 글만 블로그에 포스팅하는 것도 괴롭다.
사실 이 블로그는 우울함을 코스프레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니 발치

4번째 사랑니를 뽑았다.

스켈링을 하러갔다가 충치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으니 발치하자는 권유를 받았다. 어차피 반대에 맞물리는 치아도 없고, 중기 충치라니 잇몸 건강을 위해서도 유지할 까닭이 없었다.

나는 그동안 사랑니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뽑혀진 사랑니를 한동안 바라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은 블로그를 이전하면서 따로 클라우드 노트로 옮겨놓았지만 예전 블로그에는 사랑니에 관한 포스팅을 하기도 했었더랬다. 어느정도 애증의 대상인 셈이다.

이번 발치는 어려움이 없었다.
별로 붇지도 않았고, 마취가 풀리고 크게 아프지도 않았다.

예전에 뿌리가 신경을 지나고 있어 대학병원에 가서 매복 사랑니를 뽑은 적이 있다.
그때는 온갖 무서운 말들이 적힌 수술 동의서에 서약을 했고 의사선생님께서도 꽤 오랜시간동안 고생하셨었다. 신경과 겹쳐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경 손상은 불가피하다고 하셨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행히도 회복이 잘 된 것 같다.

턱관절과 치아 교합 그리고 사랑니로 갖은 고생. 많은 돈을 사용했었는데 이렇게 마지막 사랑니를 뽑아내니 기분이 참 묘하다. 별다른 어떤 생각은 들지 않는데 그냥 기분이 참 묘하다.

마음을 다루는 것에 관하여

요즘 몇 가지 짜증나는 일이 있었다.
누구나 종종 만나는 일상의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몇 밤을 지나 그것을 마음으로 잘 소화해냈다. 그렇다고 믿는다.
모든일은 그저 벌어질 뿐이며 그것에 대한 관점을 조금 바꿔주면 되는 일이었기에 시간을 두고 찬찬히 생각해보니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생각하는 관점을 조금 바꾸는 것만으로 우리는 많은 일들을 다르게 대할 수 있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이는 항상 좋은 경우에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피곤하면 별 것 아닌 일에도 금새 짜증이 나는 것처럼 우리 마음은 안 좋은 방향으로 계속 뻗어나갈 수도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힘든 일도 어쨌든 지나간다는 의미이지만 아주 행복한 순간에 이 말을 꼽씹어본다면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그 찰나의 순간 또한 금새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훈을 불행할 때만 선택적으로 차용하는 전략을 발휘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전략을 아주 잘 내재화 시킨 것이 우리가 알고있는 몇 가지 대중적인 종교들이다. 그들은 맹목적인 교리나 믿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안식을 준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눈을 가릴지라도 아무튼 그것들은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데 매우 탁월한 전략임에 틀림없다.
꼭 종교 뿐만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기 편향적인 시야를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들의 태도가 어떻게 사회와 어울리던 간에 자신의 방어 기제로는 썩 나쁘지 않은 전략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조금의 의심이 드는 것이다.
조금 다른 관점의 이유를 다는 것만으로 이렇듯 감정을 제 멋대로 주무를 수 있다면, 과연 정의는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우리의 삶에 지향해야 할 기준점이 있느냐는 말이다.
내가 옳다고 믿고 원칙으로 삼아온 몇 가지 것들 또한 그저 내 취향에 불과한 장식장 위의 도덕상일 수 있다는 공포심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온다.

실제로 정의란 것은 개념적인 정의를 내리기가 매우 어렵고 각 개인에게 배반적으로 다가오는 것이기는 하다.
그것이 인간 사회에 얽혀있는 냉혹한 정글을 이루는 근본 토양이다.

마음을 어디로 뻗을 것이며, 어디까지의 안식을 허용할 것인가.
모든 일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그것은 내 개인에게도 그렇고 사회적인 모든 것에 그렇다.
스스로의 잘못에 추레한 변명을 주석으로 달아서는 안된다. 명백한 사회의 죄인에게 고통에서 탈주할 마취제를 투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글을 적다보니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가 되는 것 같다.
이미 마음에 새겼으나 어떻게 그 생각에 닿았는지 매번 망각하는 것 같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것들은 내 손에 닿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풍파를 담담히 대하고, 행복에는 그저 감사하자.
옳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정의를 매일 갈고 닦고 그것을 행하자.

독서 노트, 어플

다양한 독서 애플리케이션을 테스트해봤다.
그 와중에도 잡식하듯 책을 읽었고, 막무가내로 정리했다.

독서 노트와 독서 개인화 서비스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자.

독서 노트는 적는 것이 좋다.
개인의 취향과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난 모든 일에 대해서 기록하고 피드백을 얻고 곱씹는 과정을 의식적으로 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독서 노트도 마찬가지다.
보았고, 읽었고, 느꼈다면 그건 내 삶의 일부분이다. 순간 순간이 유일한 삶의 부분들이 가볍게 휘발되길 원치 않는다.

독서 개인화 서비스(=애플리케이션)은 현시점에 매력적이지 않다.
독서 노트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독서와 관련된 서비스들을 사용하던 하지 않던 그 기록의 원본은 클라우드 노트에 따로 기록될 것이다. (Keep을 독서노트로 사용하기 : 간단 리뷰 + 원노트:구체적 분석 리뷰)

그렇다면 독서 애플리케이션을 따로 이용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무엇이 있을까?
1. 짜여진 로직에 위한 맞춤 도서 추천
현재 서비스들의 도서 추천 기능이 조악하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각 주제에 관한 양서를 스스로 찾는 편이 낫다.
  1. 해당 도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의 교류(=SNS 기능), 사유의 교류
    : 충분한 볼륨을 가진 서비스를 찾지 못했다. 하루에 수십건의 기록이 대부분이라 작은 소모임 정도의 성격이 강하다. 그마저도 생각의 교류라기보다는 그저 단순한 인삿말 대잔치가 되어있는 것 같다. 어떤 생각에 대한 교류를 위해서 독서 개인화 서비스는 매우 소극적, 블로그 포스팅 역시 소극적이라고 생각된다. 사람들이 많은 커뮤니티에 내 생각을 잘 정리해 화두를 던지거나 믿을만한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고 대화를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포스팅 전에 거인의 서재, 브래드, Do북코스, 플라이북(Flybook), 북플(Bookple), 북맥, 독서다이어리, 북 매니저, 유저스토리북(PC)를 테스트해보았습니다. 이 외에 제가 모르는 좋은 독서 서비스가 있다면 추천 부탁드려요.
그나마 북맥이 책의 리뷰를 모아보기는 편했는데 이는 각 도서 판매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어서 굳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 영화나 연극, 뮤지컬, 공연등도 KEEP + 원노트로 일원화시켜서 관리해야겠다고 생각된다.

Lenovo E320

레노버 Lenovo E320

내 생애 두번째 노트북. Lenovo(레노버) E320

첫번째 노트북은 상품으로 받은 X-Note P210이었는데 분홍빛이 감도는 디자인이라 한동안 사용하다가 누나를 줘버렸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내가 선택하고 구입한 첫번째 노트북이라고 할 수 있다.
구입 당시 상당한 고사양에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이 매력적이었다. 거기에 외장그래픽 카드도 달려있어서 축구 게임인 위닝을 티비에 연결해 플레이하겠다던 나의 숨은 니즈를 만족시켜줬다! 아쉽게도 티비에 연결하면 꽤나 버벅거렸기에 거의 플레이하지 못하고 그 쯤에 구입했던 엑스박스 패드를 중고로 판매하기도 했었다…

요즘에는 귀찮아서 그렇게까지는 안하는 편인데 당시에는 카드 할인이니 현금성 포인트니 뭐든 싹싹 긁어서 50만원 후반대에 구입했던 것 같다. 현금성 포인트나 청구할인등을 제외하면 70만원 좀 더 됐으려나?

아무튼 이 녀석으로 돈도 참 많이 벌었고, 많은 일을 함께 했다.
몇 년 전에 전자기기 덕후로 빙의했을 때 수 많은 태블릿을 구매 – 판매했음에도 지금까지 손에 쥐고 있던 녀석이다. 근 1년 넘게는 데스크탑을 사용하면서 전원조차 켜보지 않았지만 왠지 판매할 생각이 들지 않았던 녀석.

물론 이 녀석을 가지고 무언가를 했던 건 나 스스로지만 그 순간 순간 시간들 속에 함께 들어있기에 괜시리 애착이 가는 동지같은 녀석이다.
정말 고생했다고 나한테, 이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2017년 5월 22일 새벽

요새는 딱히 글을 적지 않았다.

내 삶에 도움이 될만한 몇 가지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의 한 타래를 잡아서 이리 저리 깍고 연마해보고 싶은 충동이 들곤한다. 좀 더 솔직하게 고백해보건데 그건 어떤 생각이 아니라 감정에 관한 것일게다.

생각에 관해 말해보자면 세상이 너무 좋은 탓에 굳이 내가 무언가를 적어 올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책을 고를 안목이 있다면 좋은 양서들은 도서관에 차고 넘치고, 요즘에는 그 어떤 기술, 전문 분야에 관해서도 인터넷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제대로된 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가장 최근의 정보와 최고의 전문가들을 방 안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그런 온라인 세계에 나의 조잡한 사족을 더할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충동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그 행위만으로 나를 기쁘게 하는 것. 몰입할 수 있는 것. 순전히 개인적인 것들말이다.

물론 갖가지 감정들은 글이라는 틀 안에 온전히 채워지지 못하고 흘러 날아간다.
글은 본디 기교에 불과하고 선과 의미로 결박된 형상의 공백은 오해나 상상으로 채워진다.
모든 초고는 걸레라지만 나는 스스로의 투박함과 모남이 그리울 때가 많다. 그래서 이 글은 수정 따위 거치지 않고 박제될 운명에 있다. 낙서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오늘은 그저 머리 속에 있는 것을 휘휘저어 마루 바닥에 부워놓은 것 같은 글을 적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