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딩 야학

코딩 야학을 신청했다. (2018.07.20)

딱히 커리큘럼에 대한 계획은 없어서 만만한 ‘코딩수업(WEB1)’을 신청했다.
그동안 혼자 구글링을 통해 해왔기 때문에 차분하게 조금씩 가다듬어 볼 생각이다.

요즘 매너리즘과 우울감에 빠져있었는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진도를 체크하며 수업을 진행한다거나, 이쁘게 찍어 준 시작증 하나에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코딩야학 시작증
그렇게 며칠 텀을 두고 이틀동안 WEB1을 다 들었다.(2018.07.24)
누구나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고 간결한 수업이었다.
일단 WEBn쪽 수업들은 가볍게 들을만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매일 조금씩 진도를 나가보려고 한다.

 

씨몽키 키우기 두번째

다이소에 갔다가 우연히 씨몽키를 보았다.
그리고 한 상자를 사 집으로 가져왔다.
왠지 익숙한 전개.

실은 2년전에 씨몽키를 길렀던 적이 있었다.
두달여를 기르다가 모두 죽어버렸는데, 왠지 맘이 편치 않아 앞으로는 기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이런 걸 두고 선택적 망각이라는 건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번에는 잘 기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번에는 가장 작은 2,000원짜리 씨몽키 세트였는데, 이번에는 3,000원짜리를 샀다.
‘조금이라도 큰 곳에서 기르면 좀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번에는 두 달(2018.05.01~2018.07.10)을 조금 더 살았다.
하지만 역시나 몹쓸 짓을 한 것 같다.

이번에 알게 된 문제점을 살펴보자면 아래와 같다.
일단 같이 동봉된 공기 펌프의 내구도가 조악해서 일 이주만에 찢어졌다. 덕분에 나는 매일 빨대로 공기를 불어넣으며 인간 여과기 역할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날수록 물이끼가 끼었고 한 눈에 보기에도 물이 탁해졌다. 물갈이도 고려해봤는데 기존 생존 환경과 염도를 맞추지 못하면 치명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포기했다.
즉, 애초에 다이소 세트는 씨몽키들이 장기간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닌 것 같다. 그 정도 기간을 예상하고 먹이도 딱 그정도만 넣어놨겠지…

나는 녀석들을 부화시켜놓고 또 시한부 삶을 살게 한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든다. 애초에 제대로 기르려면 물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구비해야 하는데 그것들이 이뤄지지 않았다.
다시 생각이 닿으면 다음에는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 작은 물생활을 시도해볼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다이소에서 씨몽키 세트를 다시 구입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한달 정도 지나 많은 수의 씨몽키가 죽자 가족들도 몹쓸 짓을 하는 것이라며 나를 비난했는데, 특히 어머니는 알테미아(씨몽키)가 다른 물고기들의 먹이로 많이 쓰인다는 사실을 알고 여러모로 너무 안됐다고 하셨다.

아무튼 살아있는 녀석들을 직접 죽일 수는 없어서 탁한 수조에서 오랜 시간을 살게했다. 그리고 오늘 죽은 녀석들을 건져 화분에 묻어주었다. 녀석들에게 직접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018.07.06

요즘은 삶의 모든 것에 대한 의욕이 없어서, 이것 저것 그저 만지작 거리고 있던 차에, 예전에 깔아두었던 구글어스 프로와 스페이스 엔진에 손이 갔다.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는 세상의 광대함은 온 몸을 쭈뼛하게 만들었다.

“There are only two ways to live your life. One is as though nothing is a miracle. The other is as though everything is.” 라던가.

혐오에 대해 조금 적어 봄

요즘 시대의 혐오라는 것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나는 혐오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인간적으로 추구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혐오는 차이에서 발생하는 균열을 메꿀 의지가 없을 때 발생한다.
오해라는 것은 늘상 있는 것이지만, 그 문제를 끌어안고 싶지 않을때.
그 귀결은 혐오로 향한다.

재수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너나 나나 다 같이 틀렸다.
완벽한 것은 없고 누구나 조금씩 혹은 더 많이 틀렸다.
무작정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논의를 전혀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양하자.
언제나 당시의 상황에서 각각 양보해야 할 절충선이라는 것이 흐릿하더라도 존재한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 서로 할퀸 부분을 다시 서로 메꾸며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과정을 미루어 놓고, 변하기 싫은 시시한 자기 자신을 인정하기 싫어서.
타인을 끌어안아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편리한 혐오를 선택할 뿐이다.

혐오는 편리하다. 그리고 변화를 싫어한다.
사랑의 부재다.
나약함에 대한 증거다.

별을 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내자.

마음을 꿰어 하늘에 걸어두고 작은 나를 내려보자.

밤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런 나라도 반짝일거야.

걸어둔 맘이 눈에서 달아나지 않도록 고개를 들어.

진짜 별이 되는 날.
빛나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 봐 줄 누군가를 위해 반짝이고 싶어서 오늘을 짜내.

생각의 유연함

개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인간사는 관점의 문제다.

어른들이 세상을 어렵게 사는 것은 천박함이 쉬이 전염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것보다 빼앗는 것이 쉽고 빠른 전략이다.
때문에 사회에는 작은 악행들이 전파되고, 상처받고 다시 전염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부정적이고 어두운 믿음을 내면화한다는 점에 있다.

세상은 그저 있는대로 돌아갈 뿐이고, 사람이 선택한 가치관 각각에는 항상 거시적인 면면이 있다.
다수는 경험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처를 확대하고 흉터를 온 몸으로 잠식시킨다.
누구라도 세상을 부분적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점에 있어서, 이는 순전히 개인적 경험이라고 반문해볼만도 하다. 그러나 순수함을 잃어가는 것이 개인적 측면에서도 좋은 영향을 끼칠리 만무하다.

세상을 살아가며 이미 세우고 앞으로 세울 원칙들이 자신을 옭아맬 수도 있다.
과거의 경험은 현재를 제대로 살게하는 맞춤 양복이 아니다.

내 외부의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내 안에서 어떠한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결국 그것을 수용하고 말고는 내 선택의 문제다.
내가 살아온 시간과 함께한 생각들이 스스로에게 어떤 생각을 발화시키더라도 결국 그것을 수용하고 말고는 내 선택의 문제다. 관점/생각은 스스로가 비틀 수 있다.

삶을 즐거운 여행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을 유연하게 다루는 법을 배워야한다.
무언가를 쉽게 믿지말자. 자신의 믿음은 무의식을 이끄는 나침반이기 때문에 그 단어 하나까지도 엄밀하게 따져야하며, 하나의 격언 따위가 내 삶을 온전히 지배해서는 안된다. 늘 깨어있기를.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트로이메라이

슈만의 Träumerei는 독일어로 공상, 몽상등을 일컽는 단어이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트라이메라이는 단순한 연주라기보다는 한 편의 인생 이야기 같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난 뒤 여든이 넘어서야 고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된 호로비츠. 자신의 천재성은 체제 선전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그 상황 속에 호로비츠는 고향 땅에서 연주하는 꿈을 꿀 수나 있었을까?

슈만이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면서 만든 곡인 트라이메라이를 연주하는 호로비츠의 심정은 어땠을까.

한 노인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그의 얼굴에 내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