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카드 충전 사기 당한 돈 받아낸 이야기

때는 5월 말.
평양냉면 한번도 안 먹어봤다는 친구 우래옥에 가서 평냉 먹일려고 더위를 물개처럼 헤치고 지하철 역에 도착했음. (우래옥 평양냉면 맛은 있는데 좀 비쌈. 대기줄은 긴데 그래도 회전이 빨라서 30분이면 보통 먹을 수 있음)

그런데 왠 할아버지 될 듯 말 듯한 중년의 아저씨가 우물쭈뼛하면서 나한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교통카드 충전 금액이 다 되어서 집에 가지 못해 난처한 상황이라고 했다.
사실 본인은 10여년 전에도 이렇게 돈을 빌려줬다가 받지 못했던 호구 체질인지라 이게 좀 흔한 레파토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짧은 순간에 든 생각은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어르신의 입장에서는 정말 난처할 수 있다 싶었다. 마침 아버지 연배처럼 보이기도 하고.
실제로 난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가능성을 만드는 것보다는 내가 만원 잃어버리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변 은행까지가서 돈을 인출해 충전해드리고 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물론 사기꾼이었다.
게다가 전화번호를 검색해보니 상습범이었다.

여기서 재수없다고 생각하고 그만 둘 수도 있었다. 사실 만원이면 최저시급 1시간의 노동인데 이거 신경쓰고 시간 버릴 바에 무시하는게 더 이득이니까.
그렇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이유는 나는 거짓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선의를 베풀었는데, 또 다른 피해자들도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나는 그런 마음들이 배신당하면 안된다고 생각했기에 이 행각을 그냥 지나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찰서에 신고함.
고소장을 써본 건 처음이었는데, 입구에서 소액 사기라고 하니까 지원팀으로 연결해주고 다시 간단한 고소장을 육하원칙에 맞게 작성하고 나니 경제팀으로 사건을 배당해줬다. 시간이 흘러서 담당 수사관님과 몇 번의 통화. 수사관님이 CCTV 확보하고, 경찰서에 다시 출석해 수사관님이 구두로 질문하고 대답해서 작성하는 진술서 작성을 하자 고소 절차가 끝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기꾼에게서 연락이 와 돈을 변제 받았다.
친구는 사기꾼이 이 일을 하려면 지하철을 타는 비용을 썼으니 오히려 손해를 봤다고 말했다. 🙂
사실 사기꾼은 그저 돈 갚는 걸 잊어버렸다고 변명하고 형사적인 처벌을 딱히 할 수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경찰서에 사기꾼이 이런 사건으로 고소당했다는 기록을 문서화 시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아무래도 이런 기록이 많으면 다음 피해자들의 고소 수사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싶다. 피해자들이 작은 돈이라고 그냥 넘어가지 않고 따박따박 받아내야 이런 사기 수법이 수익이 안되서 결국에는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늦은 첫 코로나 후기

23.01.09 (월)
월요일 밤 자려고 누웠는데 목이 살짝 잠겼다.
코로나가 생긴 이후 마스크를 쓰고 생활을 한 덕에 흔한 목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기에 조금 싸한 기분이 들었다.

23.01.10 (화)
낮에 이상할 정도로 피곤해서 뜨거운 물로 씻고 나왔는데, 갑자기 오한이 찾아왔다. 요즘 코로나는 기관지가 안 좋아진다는 말만 들어서 코로나는 아니고 유행하는 독감에 걸린게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저녁 무렵까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자가검진키트를 이용해 검사해봤다. 처음에는 음성으로 나왔는데 1시간이 훌쩍 지나 다시 살펴보니 T자 부분에 보일듯 말듯한 두 줄이 표시되어 PCR 검사를 받고 왔다.
살짝 열감이 있어서 이부프로펜이 들어간 경구용 감기약을 먹고 잤다.

23.01.11 (수)
오전에 확진 문자를 받았다.
은연중에 예상했던지라 일상적으로 아침을 먹었다. 이때부터 체온을 재기 시작했는데 식 후 1시간 정도 지나니 39도를 넘어섰다. 어제 먹었던 이부프로펜이 들어간 감기약을 먹고 한 숨 자고 일어났다. 37~38도를 왔다갔다했다.
이 날은 온도 조절이 안되서 끼니때마다 감기약을 한 알씩 먹었다. 비타민B, D, 아연도 먹었다.
오한이 찾아오면 전기장판 깔고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잤다. 자고 일어나면 땀이 흠뻑 났는데 이러면 잠깐씩 체온이 적정수준으로 돌아오고 다시 일어나 있으면 온도가 오르고 다시 잠깐 자고를 반복했다.

23.01.12 (목)
잠을 너무 많이 잔 탓에 아침 일찍 깼다. 잠깐 스트레칭을 하는데 속이 뒤집히는 것처럼 갑자기 역함이 밀려와 구토를 할 뻔 해서 다시 누웠다. 다행히 체온은 37도 초반에서 유지가 되서 약을 안 먹어보기로 했다.
오후가 되니 체온은 36.x~37.x 수준으로 안정됐다.
저녁 무렵부터는 목이 엄청 아팠다. 열이 안나서 이제 계속 나아지겠구나했는데, 침 한번 삼키기가 어려울 정도로 아팠고 밖에서 만져도 목이 뜨끈뜨끈할 정도라 그 여파로 두통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코가 막히고 침을 삼킬 때의 통증 때문에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일어나 물 한컵 먹고 쉬다가 잠깐 자고 일어나 물 마시고 잠깐 자는 식으로 밤을 보냈다.

23.01.13 (금)
7시쯤 다시 잠에 들어서 11시쯤 일어났는데, 놀랍게도 목의 통증이 덜했다. 침을 삼킬 때 불편한 정도는 같은데 싸한 느낌이 줄었다고 해야할 것 같다.
그런데 점심을 먹다보니 맛이 잘 안나는 걸 알 수 있었다. 혹시나해서 다른 자극적인 음식, 간식들도 먹어보아쓴데 확실히 맛이 잘 나지 않았다.
목의 통증은 줄었지만 발작적으로 나는 마른 기침은 오히려 늘었다.
이제 관리만 잘해주면 이번 코로나는 큰 무리없이 잘 지나가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23.01.14 (토)
오후쯤 되니 귀신같이 침을 삼켜도 목이 아프지 않음.
목이 간지러워서 마른 기침은 하지만 갑자기 나오는 기침도 줄었음.

220824

오늘은 친구 녀석이 쉬는 날이라 친구 집에서 간단히 먹고 얘기 나누며 놀다왔다.

다만 좀 뜻밖의 생각이 들어서 기억을 남겨보고자 한다.
이제 근 20년을 본 여러 친구 중 한명이고 자주 만나기도 하니 나는 그 친구를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근황토크는 수시로 하기 때문에 일거수일투족을 잘 알고 있기도 하다.
불만이나 자기 생각을 돌려 말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기에 더욱 그랬다. 워낙 깐깐하기도 하고.

최근에 친구가 취미 생활을 새로 시작했음을 알았는데, 오늘 그것들을 직접 보고 정말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지나가는 얘기로 들었던 기억이 얼핏 스치는 것이, 실은 그 취미가 엄청 오래전부터 이미 작게나마 시작 되어있었던 오랜동안 갈망하던 일이였던 것이다.

그런생각이 들자 어떤 뭉클한 감정이 느껴졌다.
너무 익숙해서 배경이라고 느끼던 것들에서 전혀 눈치채지 못하던 사이에 새싹이 피어나와 그 푸름이 회색을 물들이고 있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고나 할까.

‘너마저도 내가 모르던 새 꺼풀이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그전까지의 내 마음이 쥘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느껴져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220808 봉은사

점심 무렵 갑자기 비오는 날 봉은사 구경이 하고 싶어서 집을 나섰다.

시원한 지하철을 타고 가다보니 종합운동장역이 눈에 띄어 또 무작정 내렸다. 갑자기 올림픽 공원이 구경하고 싶어서였는데 내리고 보니 착각한 걸 알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올림픽 주 경기장 건너편에 있는 조그만 공원인 아시아공원을 한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코엑스 방향으로 가기위해 삼성교를 건넜다.
몇해 전 친구 녀석이 근처에서 일할 때 몇번 놀러왔던 기억이 있어서 삼성교랑 코엑스 부근의 지리는 익숙했다.

비오는 날 삼성교

바로 봉은사로 갈까 하다가 몸이 좀 축축한 듯해서 코엑스로 들어갔다.
코엑스 던전은 공사가 완료된 후에 좀 정돈된 건지 내가 익숙해진건지 그나마 길 찾기가 수월했다. 무인양품 들러서 쇼핑도 하고 별마당 도서관도 잠깐 들러서 경제 잡지 좀 읽다가 봉은사역으로 나왔다.

봉은사 연꽃축제

생각도 안했는데 연꽃 축제 중인 연꽃들이 세 줄로 서서 맞이해줬다.

나는 참 운도 좋지.

봉은사 미륵불

실은 봉은사 미륵불 한번 보고 그 뒤로 이어지는 산책로 한번 걷고 올 생각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맞이하듯 멋지게 차려입은 봉은사가 고맙게 느껴졌다.

비오는날 ASMR을 라이브로 들으면서 산책길을 걸으니 절간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와 절묘한 화음을 이뤘다.

특별할 거 없지만 왠지 기록하고 싶은 하루라 적어본다.

220607 응봉산


전날 내린 비로 월요일 내내 날이 좋았고 화요일 오전에도 날이 좋아 오후에는 산에 올라 사진을 찍으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응봉산으로 가는 길에는 먹구름이 끼었다.
이미 작심한터라 조금은 아쉬운 맘으로 갔는데, 정상에 가까워지자 장난처럼 잠깐동안 햇빛이 내리쬐었다. 그 사이 몇장 찍지는 못했지만, 햇빛이 나는 순간의 감동만으로도 다 보상받은 듯 했다.

지도 비교 정리

저의 지도 사용목적은 다녀온 곳의 기억을 정리하고 추후 재방문 고려 그리고 가고 싶은 곳을 새로 찾을 때 도움이 될 정보를 정리하는 것에 있습니다.

  • 구글지도, 카카오맵, 네이버지도 공통사항
    – 위치 묶음 기능 : 비공개 가능, 전체 및 개별 리스트 지도뷰 가능
    (구글 – 목록저장, 카카오맵 – 즐겨찾기 폴더, 네이버지도 – 메인에서 즐겨찾기 or 마이플레이스에서 저장 -> 리스트)
    – 특정 카테고리(카페나 식당, ATM, 화장실등)에 속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 신규 장소 등록 및 정보 수정시 회사에 문의한다.

  • 구글지도 (with 내 지도)
    – 해외 지역 가능
    – 내장소 -> 지도(내 지도)를 활용하면 식당이나 건물이 아닌 특정 장소와 경로를 임의로 지정하고 기록할 수 있다. 지도를 내 맘대로 그린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예 : 좋은 전망, ~한 곳, 등산로 이동경로 남기기)
    – 별도로 내 지도에 “언제-어디-누구”를 제목으로 목록을 만들고 상세 설명을 기입해두면 좋다. 갔던 곳에 내가 남긴 리뷰 그리고 구글 타임라인을 확인하여 재검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내 장소(내 목록)은 기본 지도뷰에 노출되지만 내 지도에 기록한 곳은 해당 카테고리로 이동하기 전에는 노출되지 않는다.
    – 지도에서 없어지는 곳(폐업)은 기록이 사라지기도 했다. 내 지도에 별도의 저장을 해두면 기록을 보존할 수 있다.

  • 카카오맵

  • 네이버지도
    리뷰(마이 플레이스)와 저장이 분리되어 있다. 리뷰의 경우 영수증이 있거나 네이버에서 주문한 사람만 남길 수 있다. 개인적 기록을 위해서라면 ‘저장’ 카테고리를 이용하자.
    – 마이 플레이스에 좋아요 버튼이 있어서 취향을 추천 받을 수 있다.

    ——————————————————————————————————

네이버지도 카카오맵은 국내에 한정하여 더 구체적인 정보를 찾아보기 쉽고, 구글지도는 국내, 해외 모두 가능하다.

경험상 세 곳 모두 지도 수정을 재빨리 해주지 않고 수차례 문의해야 고쳐지는 경우가 더 많다. 각각 누락된 부분이 다른 경우가 있으므로 3개 다 쓰는게 마음 편하다.

<기타>

  • OpenStreetMap(오픈스트리트맵), vworld : 없는 곳이 많다.
  • Foursqure : 나름 재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커뮤니티가 말라 죽어가는 느낌.
  • Swarm : 재방문 기록을 남기고 카테고리 별로 찾아 방문하는 재미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재미.
  • 망고플레이트
  • 램플러
  • 구글 내 지도 vs 여행을 다녀온 후에 원노트에 정리한 것.
  • 등산 경로 램플러에서 지도 데이터 받아서 옮기면 될 듯

Obsidian

최근에 주력으로 사용중.
하나의 보관함에 모두 넣어놓고 폴더를 테마나 프로젝터 단위로 만든다.
연관성을 위하여 하나의 볼트에 다 정리하고 대신에 하나의 프로젝트를 집중해서 볼 경우에 폴더만 열기를 선택하면 집중과 연결의 유연성을 모두 취할 수 있다.

#태그는 공백이 안 들어가는 것 같다. 체크 필요. 태그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는 것들.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내용.

[[백링크]]는 공백 들어감. 백링크는 별도의 추가 설명이 필요한 것들.
백링크의 장점은 수동으로 링크를 거는 것보다 편하고 백링크된 노트 제목을 수정하면 해당 노트가 백링크로 달린 링크가 일괄 수정 된다.
블로그에서 비슷하게 사용하는 경우 절대 주소가 있기 때문에 비슷하게 사용할 수 있다.
원노트에서는 기존 노트의 이름을 바꾸면 곤란해진다. 그렇지만 처음에 만든 노트 이름을 수정하지 않으면 비슷하게 사용 가능. 원노트의 경우 노트의 일부 부분을 선택해서 링크도 가능한 장점이 있다.

프로그램 내 탐색기는 일괄 선택이 되지 않는데, 윈도우 탐색기를 이용해서 직접 파일을 옮기면 된다.

모바일 버전이 나오기는 했는데 실시간 싱크를 하려면 무료 모델의 경우 서드파티 앱을 써야 되는데 보안상 저장소를 열어주기 껄끄러워서 고민중
(21.08.26)

노래를 Obsidian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구글 뮤직에 태그를 넣는 것을 시작으로 노래를 본격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각각의 스트리밍 사이트들은 노래에 대한 내 감상을 정리하기 만족스럽지 않았고 서비스에 종속되니 없어지는 서비스나 바뀌는 세부 내용들이 있어 짜증이 났다.
여기에서 NAS나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해 모든 음원을 직접 소유할까 오랫동안 고민해봤지만 그건 시간의 낭비를 초래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음악에 대한 ‘개인적 기억’, 느낌을 담은 ‘태그’들의 데이터를 직접 소유하고 그때 그때 좋아하는 노래들을 찾아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기로 결정. 여기저기 분산되어있던 정보를 긁어 Obsidian 음악 폴더에 넣기 시작.
예외적으로 인기가 없어 구하기 힘든 음악들은 별도로 음원 파일을 소장.
정리가 끝나고 시간이 나면 Spotify 가입해서 추천곡들 테스트 예정.
(21.07.06)


Obsidian을 체크 리스크를 사용하기 위해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할 일도 여기에 적지 않을 것이다. 이 노트는 많은 내용들을 쏟아넣어 그것들이 얽힐 때 힘을 발휘하는데 그러자면 내가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 되는 일도 그 안에서 길을 잃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나 나중에 웃으려고 모아둔 유머등도 담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이미 완결되어 개별적으로 존재하니까 외부 링크로 충분하다.
혹은 나중에 필요한 이미지(알림, 메뉴얼, 영수증등)를 스캔해 저장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정말이지 필요한 순간외에는 다른 정보들과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회상을 도와주려고 미리 만들어놓은 마인드맵을 그리기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림을 못그리니…

데이터 가공 및 뷰어라는 점에서 Notion가 겹치는 부분은 있으나 Obsidian이 서술적이다.
Notion이 엑셀이나 PPT같은 보고서라면 Obsidian은 자전적 소설이다.

개념이나 병렬적으로 얽히는 데이터 베이스 작성이 최적화되어있다.

노트간의 연결성을 이미지로 보여주지만 그건 마인드맵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마인드 맵을 한글자로 표현하자면 ‘이미지’이다. 함축적이고 연상적인 이미지가 중요한 것이지 그 연결성은 또 다른 한 축에 불과하다. 위에서 말한 것을 다시 이야기 한다. Obsidian은 서술적이다.

생각, 가치관 or 단일 주제에 대해 얽힌 생각을 정리하기에 최적화 되어있다.
물론 더 많은 내용을 담을수록 파괴적이겠지만 부족한 점이 명확하다.
★Obsidian을 활용할 때는 해당 노트의 내용들을 서로 엮어야 한다. 노트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Keep을 사용할 때 훨씬 편리할 것이다.

※ 예전에 에버노트의 서드파티앱 중에 이런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그저 뷰어같았고 이건 그때의 개념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아서 감동했다.

Obsidian의 키워드 “얽힘”
개별적으로 존재해야하는 기록과는 철저히 분리해야 한다. 또한 어떠한 단위 속에서 힘을 발휘하는 주제들과도 구별해야 한다. 당신이 주식책을 구매했는데 거기서 문학에 대해 다룬다면 당신은 짜증이 나고 별 다른 효용성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 폴더 단위로만 여는 방법을 알게 된 후 이런 단점은 사라졌다.

씨몽키 키우기 두번째

다이소에 갔다가 우연히 씨몽키를 보았다.
그리고 한 상자를 사 집으로 가져왔다.
왠지 익숙한 전개.

실은 2년전에 씨몽키를 길렀던 적이 있었다.
두달여를 기르다가 모두 죽어버렸는데, 왠지 맘이 편치 않아 앞으로는 기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이런 걸 두고 선택적 망각이라는 건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번에는 잘 기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번에는 가장 작은 2,000원짜리 씨몽키 세트였는데, 이번에는 3,000원짜리를 샀다.
‘조금이라도 큰 곳에서 기르면 좀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번에는 두 달(2018.05.01~2018.07.10)을 조금 더 살았다.
하지만 역시나 몹쓸 짓을 한 것 같다.

이번에 알게 된 문제점을 살펴보자면 아래와 같다.
일단 같이 동봉된 공기 펌프의 내구도가 조악해서 일 이주만에 찢어졌다. 덕분에 나는 매일 빨대로 공기를 불어넣으며 인간 여과기 역할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날수록 물이끼가 끼었고 한 눈에 보기에도 물이 탁해졌다. 물갈이도 고려해봤는데 기존 생존 환경과 염도를 맞추지 못하면 치명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포기했다.
즉, 애초에 다이소 세트는 씨몽키들이 장기간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닌 것 같다. 그 정도 기간을 예상하고 먹이도 딱 그정도만 넣어놨겠지…

나는 녀석들을 부화시켜놓고 또 시한부 삶을 살게 한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든다. 애초에 제대로 기르려면 물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구비해야 하는데 그것들이 이뤄지지 않았다.
다시 생각이 닿으면 다음에는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 작은 물생활을 시도해볼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다이소에서 씨몽키 세트를 다시 구입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한달 정도 지나 많은 수의 씨몽키가 죽자 가족들도 몹쓸 짓을 하는 것이라며 나를 비난했는데, 특히 어머니는 알테미아(씨몽키)가 다른 물고기들의 먹이로 많이 쓰인다는 사실을 알고 여러모로 너무 안됐다고 하셨다.

아무튼 살아있는 녀석들을 직접 죽일 수는 없어서 탁한 수조에서 오랜 시간을 살게했다. 그리고 오늘 죽은 녀석들을 건져 화분에 묻어주었다. 녀석들에게 직접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018년 3월 19일

삼일이 채 되지 못하는 장례식.
쪽잠에 수 백여명의 손님을 받아들이기에는 7개월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버거운 시간이었지만, 80년이 넘는 관계를 정리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작년보다는 모든 것이 쉬웠다.
익숙한 절차를 밟았고 무엇보다 평일, 지방에서 열린 장례식장에 발길이 닿기보다는 손가락으로 전하는 추모가 합리적으로 보이기 충분했다.

환각작용을 일으킬 정도의 마약성 진통제도 통하지 않는 말기암의 고통은 나로서는 감히 공감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우주가 시들어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들어왔던 나로서는 이게 잘된 일인지 안 된 일인지 혼란스러워 그저 “되어야 할대로 되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이다.”라고 우물우물 입으로 흘렸다.

1년 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나의 1년 역시 많은 일들이 더해진 시간이었지만, 외조부모님들의 1년은 하나의 세계가 완전히 파괴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살겠다던 단단한 말이 죽겠다는 말로 바뀌는데 6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녀석은 그 사이 죽음의 무게를 조금 이해했는지 짧게나마 슬픈 낯빛을 보였다.

따스해지던 날에 종일 비가 뿌리고 이틀날에는 청명한 하늘을 드러냈다.
발인일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숨구멍으로 조금씩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할머니의 옷가지와 짐 꾸러미만을 꺼내서 반쯤 정리했던 집안의 가구들도 모두 들어냈다. 엄마는 조금은 다른 곳이 되어서 기분이 나아졌다고했다.
너무 아파서 시간이 숙성해주기 전에는 바라보지 않아야 될 기억일거라고, 그리 생각했다.

어제. 5일째.
묘 위에 놓여진 한 무더기의 동백꽃에서 향내음이 날 듯 말 듯 했다.
서울 촌놈의 둔감한 몸에도 봄이 오는 듯한 무엇가를 느끼기 충분한 날이었다.

불은 차가운 겨울 속에서 오랜 시간을 숨 죽이다가 튀쳐나온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짧다면 짧은 생의 흔적이지만 어찌 그리도 급하게 거두어가는가. 곧 살아왔던 이야기와 남기고 간 것들이 연기와 흙이 되었다. 마치 새로 태어나는 생명에 화답하듯 화하였다.

어린 날의 혈기는 내게 모든 것에 도전하도록 부추겼다.
그리고 최선의 실패는 스스로를 겁쟁이로 만들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 이제는 어떻게든 부여잡아야  할 것과 세상이 가는 대로 흘러가도록 두어야 할 것을 조금은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2017년 8월 16일

상을 치르고 왔다.

직계 가족의 상을 치른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성인이 된 뒤 상주의 격식을 차려 상을 지낸 것은 처음이었다.
많은 일들을 더 큰 어른들께서 진행하셨지만 이번 한 주일이 몇 년처럼 두꺼운 밀도로 내 삶을 채웠다.

상 중에 한 어르신께서 나지막이 호상이라는 말을 내게 해주셨다.
우리는 평소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연명 치료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소 마스크조차 떼어내려 하시는 손길을 부여잡으며 그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
때문에 그 단어에 깊은 이질감이 느꼈다. 하지만 따로 소리내어 고치지는 않았다.

꼬박 이틀동안 천 여명의 손님을 받았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식사값이 그에 준하였다.
지친 몸에 장례식은 산 사람을 위한 행사라는 뾰족한 마음이 들었으나, 절하고 또 절했다.
우리는 사람에, 술에. 그리고 이 일련의 장례 절차에 취한 것 같았다. 슬픔을 무언가로 태워 재로 화하여야만 했다. 끝없이 절하고 쪽잠을 자는 것이 조금이라도 우리의 슬픔을 승화시켜나갔을 것이다.

아직 학교도 가지 않은 조그마한 사촌 동생들은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갔다며 방방 뛰었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다혈질인 우리 가족답게 서로를 끌어안고 위로하는 와중에도 종종 싸웠다.
그러면서도 진심으로 의지했다.
그것을 보면서 삶의 모든 것이 미묘하고도 깊숙하게 엉켜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내가 삶의 다음 이면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정도의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로 몇 해가 지나자 꼭 갖고 싶은 것이 없게 되었다. 큰 부자는 아니나 욕심쟁이도 아닌 것 같다.
그 후 몇 년은 하고 싶은 것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이 역시 시간이 지나자 꼭 해야만 할 도전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걸 못해서 진정으로 후회할까? 라는 게 딱히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에 대한 애착같은 것이 생긴다.
물론 그와 동시에 타인에 대한 실망과 공포도 늘어간다.
그래서 나는 선량한 사람들을 그리도 찾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상을 치르며 내게는 가족과 사람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뿌리 깊게 인식하게 되었다.

장례식 중 단 한번 할아버지께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울음을 밖으로 꺼내셨다. 굳게 잠가놓은 단단한 마음조차도 입관 말미에는 슬픔이 부풀어 새어나오고야 만 것이다. 나는 아내를,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헤아릴 길이 없었으나 그 슬픔의 작은 단면에도 가슴이 시리었다.

발인을 하고 삼오제를 지냈다.
지금은 여느때와 다름 없이 내 방에 앉아있다.
변한 게 없는 것 같지만 마음이 헛헛하다. 그 자리에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을 하늘이 거두어 가버렸다.

아무것도 추억하지 않는데 눈물이 난다.
슬픔 또한 내 것이니 이제는 이것을 추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