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트로이메라이

슈만의 Träumerei는 독일어로 공상, 몽상등을 일컽는 단어라고 한다.
찾아보니 ‘꿈을 꿈’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트라이메라이는 단순한 연주라기보다는 한 편의 인생 이야기 같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난 뒤 여든이 넘어서야 고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된 호로비츠. 자신의 천재성은 체제 선전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그 상황 속에 호로비츠는 고향 땅에서 연주하는 꿈을 꿀 수나 있었을까?

슈만이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면서 만든 곡인 트라이메라이를 연주하는 호로비츠의 심정은 어땠을까.

한 노인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그의 얼굴에 내리는 듯하다.

2018년 3월 19일

삼일이 채 되지 못하는 장례식.
쪽잠에 수 백여명의 손님을 받아들이기에는 7개월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버거운 시간이었지만, 80년이 넘는 관계를 정리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작년보다는 모든 것이 쉬웠다.
익숙한 절차를 밟았고 무엇보다 평일, 지방에서 열린 장례식장에 발길이 닿기보다는 손가락으로 전하는 추모가 합리적으로 보이기 충분했다.

환각작용을 일으킬 정도의 마약성 진통제도 통하지 않는 말기암의 고통은 나로서는 감히 공감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우주가 시들어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들어왔던 나로서는 이게 잘된 일인지 안 된 일인지 혼란스러워 그저 “되어야 할대로 되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이다.”라고 우물우물 입으로 흘렸다.

1년 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나의 1년 역시 많은 일들이 더해진 시간이었지만, 외조부모님들의 1년은 하나의 세계가 완전히 파괴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살겠다던 단단한 말이 죽겠다는 말로 바뀌는데 6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녀석은 그 사이 죽음의 무게를 조금 이해했는지 짧게나마 슬픈 낯빛을 보였다.

따스해지던 날에 종일 비가 뿌리고 이틀날에는 청명한 하늘을 드러냈다.
발인일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숨구멍으로 조금씩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할머니의 옷가지와 짐 꾸러미만을 꺼내서 반쯤 정리했던 집안의 가구들도 모두 들어냈다. 엄마는 조금은 다른 곳이 되어서 기분이 나아졌다고했다.
너무 아파서 시간이 숙성해주기 전에는 바라보지 않아야 될 기억일거라고, 그리 생각했다.

어제. 5일째.
묘 위에 놓여진 한 무더기의 동백꽃에서 향내음이 날 듯 말 듯 했다.
서울 촌놈의 둔감한 몸에도 봄이 오는 듯한 무엇가를 느끼기 충분한 날이었다.

불은 차가운 겨울 속에서 오랜 시간을 숨 죽이다가 튀쳐나온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짧다면 짧은 생의 흔적이지만 어찌 그리도 급하게 거두어가는가. 곧 살아왔던 이야기와 남기고 간 것들이 연기와 흙이 되었다. 마치 새로 태어나는 생명에 화답하듯 화하였다.

어린 날의 혈기는 내게 모든 것에 도전하도록 부추겼다.
그리고 최선의 실패는 스스로를 겁쟁이로 만들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 이제는 어떻게든 부여잡아야  할 것과 세상이 가는 대로 흘러가도록 두어야 할 것을 조금은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구름 너머

무지개가 피어난 곳.
뭉게뭉게 피어난 소문 뒤로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삶 고개를 구비 구비 내려보며
눈물의 씨를 뿌리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올려볼 적에는 또렷하던 것이
실은 디딜 곳이 하나 없이 높은 바다인 것을 보았습니다.

가슴이 저물듯 아파와
어느 한 점 눈길을 두기 벅차니
이제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