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자국 물러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서는 위치가 달라지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의 발 밑은 선 자리에서 뒤로 물러서야만 볼 수가 있다.
재미있는 점은 우리가 멈춰서고, 물러서고, 그리고 고개 숙여 바라 볼 때에만 거기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치열하게 나아가는 사람은 멈춰서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은 멈춰서지 않는다.
아니. 멈춰서면 안된다. 100미터를 달려나가다 넘어지는 일은 있어도 멈춰 서는 일은 없다. 행복한 때를 맞이한 사람이 갑자기 멈춰 서 진중한 얼굴로 반성을 하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경주가 아니고 진실로 행복한 한 때가 아니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동시에 가질 수 없는 것 같다.
즐거움과 조신함을. 열정과 냉정을.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이상적인 완성에 못내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서글프면서 동시에 위로가 되는 일이다.
푸쉬킨은 말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말라.”
아마 수 년이 흐른 뒤에도 나는 여전히 나일 것이다.
그리고 단지 그것이 내가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다.
좀 더 나이먹고, 열심히 살았다면 조금은 더 세상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감정 조절에 서투르고 새로운 것들을 하는데 조심스러울 것이다.
생각이 많고 그럼에도 결국 해야 할 일을 하겠지.
기껏해야 그 정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운은 신의 것이고 인간성을 상실한 초인이 되고 싶지도 않다.
가늠할 수 없는 세상의 무게의 비해 존재의 무게는 견딜 수 없게 가벼운 것 같다.
사람들이 자신의 몸뚱이를 각자의 의미에 못 매달아 놓는 일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의미가 중요하다고 했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그런 것 없이도 사람은 살 아 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의미라는 것은 분에 넘치는 평화를 선물받은 현대인에게는 고르기 힘든 생일 선물 같은 것이다. 제대로 된 의미는 삶이 던져주는 것이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버릴 수 있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정의의 의미를 가진 사람들의 그것들은 그들의 원하는 바와 같이 삶을 지탱해주지 못한다.
결국은 우리 모두는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그냥 살 뿐이다.
하늘의 한 계단 아래에 앉은 왕이나 말석의 변변찮은 아무개나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천년 전에 세상을 호령하는 왕이었다고 해도 내 프라푸치노 한 잔 빼앗아 갈 수 없다. 단지 그게 삶에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보고 겪는 것이 많아지고 그 안에 들어가 이해하려고 발바둥치다보면 느는 것은 결국 궤변뿐임을 글을 적다가 알았다. 결국 나는 한 해를 먹을수록 더 어리숙하고 우유부단해지기만 하는구나. 그리고 언제나처럼 퇴고는 귀찮아서 못 한다.
오늘도 밤이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