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을 질주하는 법 – 차는 눈이 가는 곳으로 간다.


가스 스타인의 소설 ‘빗속을 질주하는 법’을 읽었다.
원래 제목은 ‘The Art of Racing in the Rain’ 이지만 나는 왠지 빗속을 질주하는 법이라는 제목이 더 맘에 든다.
현재는 구판이 절판되어 철학자 개 엔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판매되고 있는데 이건 썩 맘에 들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맘에 들지가 않아.
매번 심리학 도서나 갖가지 정보성 도서같은 무거운 책들만 읽다가 오랫만에 소설을 읽은 셈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 책을 구입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나방에 읽어주는 사람 없이 놓여있는 걸 어느 날 꺼내온듯한 기억만 어렴풋이 난다.

글은 엔조라는 주인공 개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엔조는 충직하고 사려가 깊으며 영적인 믿음을 가진 개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이지 이런 친구를 한 명 가지고 싶다는 맘이 생겼다.
엔조의 가족은 데니라는 이름을 가진 카레이서이다.
이야기는 데니와 그의 아내 이브. 그리고 둘 사이의 딸 조위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진행된다.
데니와 엔조는 현명한 카레이서고 그들은 트랙위를 달리는 자동자를 통해 삶에 대한 지혜를 얻는다.

누군가 이런 의미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세상의 진리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것이라고.
인생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레이서가 트랙을 달리며 세상을 배우듯 우리는 단 한가지 일에서도 삶의 의미와 나아갈 바를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라도 비가 내릴 때도 있고 혹은 폭풍우가 몰아칠 수도 있다.
때론 맑게 개이는 날이 며칠이나 계속될 수도 있고 가끔은 이런 와중에 구름이 끼기도 한다.

책이 너무나 잘 읽혀서 좋았고, 내 맘을 가볍게 정화시켜줘서 더욱 더 좋았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 읽어보길 추천한다.

“차는 눈이 가는 곳으로 간다.”

과학자의 서재 – 책 읽다가 과학자가 되고 말아버린 이야기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황소개구리와 우리말 이라는 글을 쓴 최재천 교수의 책이다. 사실 과학자라는 직업을 가진 개인의 경험과 생각을 알고 싶어서 책을 골랐기 때문에 저자에 대해서 미리 알아보고 읽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최재천 교수의 사진을 몇번이고 노려보고 나서야 “아..!” 하고 무릎을 치게 되었다. 이상할 정도로 황소개구리와 우리말이라는 글은 내 기억속에 또렷하게 남아있는데 아마 막 고등학생이 되어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와중에 배운 글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교과서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던 나의 모습과 당시의 국어 선생님, 교실의 풍경에 이르기까지 추억들을 되살려준 최재천 교수에게 갑자기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책은 최재천 교수의 성장스토리를 다룬다.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것 같은 방황과 고민이 담백하게 적혀있다. 개인적으로 위인전이나 자서전은 싫어하는데 이 책은 읽어가는 느낌이 참 좋았다. 문학에 소질이 있었던 그의 글 솜씨 때문인지 글을 읽는 것 보다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또 작가의 경험에서 내 기억들도 하나씩 떠올려 공감을 할 수 있어 좋았다. 굴을 파고 놀던 그의 이야기를 읽고는 몰래 다락방에 기어올라가 꽁기꽁기 아늑함을 즐기던 내 어린 날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이 책이 내 맘에 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내게 읽고 싶은 책들을 더해 줬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서 중간 중간 멈춰서서 당시에 읽었던 책들에 대해 설명하고는 한다. 책에 대한 간략한 정보와 그때 그 책들이 최재천 교수의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지 또 무엇을 알려줬는지 말해준다. 자신이 읽었던 책들에 대해서 얼마나 달콤하게 얘기 하는지 나는 껌뻑 속아넘어가 곧 그 책들을 읽게 될 것 같다. 특히나 우연과 필연, 사랑의 학교는 반드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과학자의 서재는 소소하게 느끼게 해주는 점이 더욱 많은 책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알콩달콩읽어 나간다면 좋을 것 같다.

엄마를 부탁해 – 잃어버린 엄마에 대한 고해성사

 제게는 얼마 지나지 않은 군 복무 시절에 읽은 책입니다. 군 시절 읽은책 중에 가장 인상깊었던 책 중 하나인 이 소설은 이미 대중에게 충분히 알려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으신 분이 있다면 이 소설의 제목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끼셨을 겁니다. ‘엄마를 부탁해’라는 제목… ‘부탁한다.’라는 사실은 누군가에게 맡겨 위임한다는 것인데 엄마라는 존재가 과연 고작 그런 대우를 받을 존재인가? 하는 의문이 드시지 않으십니까? 역시나 불길한 예감대로 소설 속 우리의 못난 자식들은 엄마를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읽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진짜 이유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바로 여러분이자 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말하는 사람의 시점을 바꿔가며 자신의 속내를 숨김없이 털어놓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읽는 이가 그 누구라도 피해 갈 수 없는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제 머리 속에서 혹은 입에서 바로 튀어나온 말인 듯 불쑥 불쑥 놀라게 합니다.

‘엄마’라는 말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을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끝없는 사랑, 포근함 또는 자신이 이 세상에 가지고 나온 모든 것들에 대한 고향. 앞선 단어들이 제가 엄마라는 말을 정의하는 다른 말들입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께서도 아마 그 이미지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 무한한 사랑의 본연인 엄마라는 말의 이미지가 맘속에 자리잡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 엄마가 사라졌습니다. 서울역에서 당신의 생일상을 받으러 오시는 길에 우린 그만 그녀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린 인파 속에서 엄마의 손을 놓쳐 버린 순간에 엄마를 잃어버렸으나 사실은 이미 언제인지도 모를 과거에 지금은 칠순이 되어버린 그녀. 박소녀씨를 잊어버린 채였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엄마라는 존재는 그저 엄마 그 자체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집으로 방문한 외삼촌께서 엄마의 이름을 불렀을 때 어린 저에게는 그 이름이 굉장히 생소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어린 시절의 일이 아직도 제 기억의 한 켠에 남아있는 까닭은 그 일로 인해 엄마라는 존재를 한 명의 개인으로 볼 수 있는 인식의 확장이 이뤄졌기 때문일겁니다. 사실 지금 우리들의 엄마들 중 다수가 시대와 삶이 주는 시련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을 사랑하기에 포기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으로서의 삶입니다. 눈매가 소처럼 맑았던 박소녀씨가 울 수 조차 없을 정도의 두통에 시달리고 자신에게 진정 소중했던 것들을 내 던지면서도 유일하게 지켜낸 것은 바로 자식들입니다. 힘이 뜰 때, 가슴이 아플 때, 외로울 때, 가련한 소망이 있을 때도 우리네 엄마들에게 삶을 사는 오직 하나의 방식은 바로 자식들이었습니다.

엄마를 잃고 나서 던지는 작가의 한 마디는 괜시리 공감이 가는 구석이 있습니다. ‘특히 나쁜 일은 발생하고 나면 되짚어지는 게 있다. 그때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싶은 것’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하는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그 결과 특히나 좋지 않을 때 더욱 되짚어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난히 운이 좋았던 일도 그 밑바닥까지 따지고 들면 별 것 아닌 요소가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은 생각보다 더욱 불확실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진실만은 다른 것들과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비평가라도 함부로 입을 열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 진실된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랑을 의심할 여지 없이 주는 사랑이 헌신적인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태어남과 동시에 어미의 몸을 파먹어 세상으로 나갈 양분을 획득하는 두꺼비가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엄마들도 시대, 삶이 주는 갈증의 몫을 혼자 지고 가려하지만, 정작 본인도 목마름에 허덕일 수 밖에 없는 한 개인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을 때, 이미 성장한 자식들은 이제와서 눈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부모 아닌 이는 있을 수 있어도 자식 아닌 이는 없습니다. 그저 한 개인인 엄마. 딸이자 형제인 엄마들이 앞으로는 그 자식들로 하여금 지금보다 행복해졌으면 하는게 작은 바램입니다.

올리브 키터리지 – 인생 엿보기

※ 이 글은 올리브 키터리지를 소개하는 글이 아니라 책을 읽었다는 전제하에 적힌 글이다. 사실 과제로 적었던 글이기는 하나 당시에 내 생각을 솔직하고 진지하게 적었기 때문에 다시 블로그로 옮긴다. 그래도 역시나.. 과제 제출이 목적이었던지라.. 너무 무겁고 좀 길다. 결국 나만을 위한 기록이다.

(당시에 함께 과제로 했던 ‘까르마조프의 형제들’과 ‘월든’의 감상문도 역시 단지 과제라고만 생각하고 적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시 읽어보고 싶지만.. 폐기처분한 것 같다.. ㅠ 지금은 당시 교수님이 학교를 떠나셨기 때문에 감상문이 잘못된 경로로 쓰이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었습니다.
실은 급하게 책을 읽어야 해서 집에서 조금 떨어진 도서관에까지 다녀왔습니다. 책은 평소에도 틈틈이 읽다보니 읽고 싶거나, 필요가 있는 책들을 항상 구입하기엔 나름 부담이 되서 빌려서 많이 읽는 편이랍니다.

뭐, 덕분에 조금은 떨어진 ( 걸어서 30~40분 ), 이사오기전에 예전에 살던 , 동네까지 천천히 걸어서 다녀와 봤습니다. 이런 것도 조금 운치 있네요. 표지에는 당당하게 ‘2009 퓰리처상 수상’이라고 적혀있네요.

퓰리처상이라… 뭐 사실 책도 본인 기호에 맞는게 있다고 믿는 편이라 이런 상의 권위는 잘 믿지 않습니다.
책을 봤습니다. 딱 첫 페이지를 읽어나가면서 느낀 기분은 여성스럽다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온화하고 부드럽다고 할 수 있겠네요. ‘헨리 키터리지’라는 캐릭터의 색깔이 초반부에 베어나와서 그런 느낌을 받은 듯 합니다. 그리고 조금은 의아했습니다. 엥? 제목을 잘못봤나….. ‘올리브 키터리지’는 남편 ‘헨리 키터리지’에게 짜증스러운 말만 간헐적으로 툭툭 던지기만 할 뿐 전면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계속 한 챕터 챕터를 읽어나가면서 올리브와 그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소설을 채워나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사건의 주변이나 사람들의 기억속에 등장하는 올리브를 찾게 되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책을 읽으실 분들을 위해서 그 내용은 어느 한 부분도 언급하기가 꺼려지네요. 왜냐하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올리브’라는 사람의 인생 한번을 경험한 듯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어려서 봤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생각나는 책이었답니다.


내가 만약에 올리브 키터리지라면?
만약 백설공주가 사과를 끔찍하게 싫어했다면?
제우스가 애처가였다면?

이런식으로 생각해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어렸을 적에 역사적 사실이나 이야기의 맥락을 살짝 바꿔 놓고 사건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상상해보는 놀이를 즐겼었다. 이 놀이는 항상 흥미로웠고 동시에 상상력을 자극시켰다. 대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작은 변화로 인해 기존의 이야기가 조금씩 계속해서 틀어지더니 결국에는 180도 뒤집혀버리는 식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지금도 무언가에 대해서 새로운 발상을 가지거나 다른 시선을 던져보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때문에 내가 올리브 키터리지라고 생각해보는 것도 기대되는 작업이었다.

소설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올리브의 어린 시절과 젊은 날은 어땠을까? 그 하루 하루의 사건, 사고들이 모여 우리가 알고 있는 올리브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해봐도 내가 그녀로써 자랐다면 나는 그녀와 다른 방향으로 성장했을 것만 같다. 그녀의 날카로운 성격과 의사표현 그리고 격렬한 감정 변화는 나와는 조금 다르다. 그녀가 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다. 다만 나는 날카롭고 공격적인 성향은 다듬어 나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이런 면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발랄하게 욕지거리를 하기도 하고 타인의 맘에 상처를 줄 만한 비판도 썩 잘한다. 물론 이것은 세상과 교류하는 그녀의 성향. 즉, 방식일 뿐이다. 키가 크고 아이들이 무서워하던 수학 교사인 그녀는 실상 너무나도 따뜻한 사람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크로스비에서 32년 동안이나 교직 생활을 해온 탓에 지금은 훌쩍 성장해버린 마을의 많은 제자들. 즉, 젊은 어른들이 그녀에게는 나이든 아이들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 그녀를 보는 제자들의 시선과 그녀가 그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 그녀가 심성이 고운 사람이라는 걸 부인 할 수 없다. 자살한 어머니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피해 마을을 떠난 케빈과 우연히 만나 가식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모습이나, 거식증에 걸린 한 소녀의 빼빼 마른 몸을 보고 눈물을 훔치는 그녀의 모습에서 교육자로서나 한 인간으로서 애정이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진다. 올리브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생각만큼 약하지 않다고, 나이가 들어서 병으로 쓰러지는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남편인 헨리와 아들인 크리스토퍼에게만은 조금 더 친절하고 솔직한 태도를 가질 순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남편인 헨리와 아들 크리스토퍼는 그녀에게 확실히 특별한 존재들이 아닌가? 훗날 헨리가 이렇게 말한다. “결혼하고 수십 년을 같이 사는 동안, 당신은 한 번도 사과를 한 적이 없는 거 같아. 무슨 일에도.” 이 순간에도 올리브는 민망했는지 헨리를 쏘아 붙인다. 물론 헨리는 올리브의 성격을 알고 있고 그러한 부분도 함께 사랑했을지 모르지만 아들 크리스토퍼는 그렇지 못했다. 크리스토퍼는 우울증에 시달렸을 정도로 괴로움에 시달렸다. 올리브에게는 아버지가 갑작스레 자살로 세상을 떠나고, 열병처럼 남 모르게 사랑을 나눴던 짐 오케이시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일. 거기에 올리브 자신의 격한 감정 변화가 더해졌다. 때문에 사랑하는 크리스토퍼를 본의 아니게 괴롭히게 됐던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크리스토퍼가 우울증을 앓기 시작한 그 때에 올리브는 아들이 아닌 자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봤어야 했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행동으로서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마흔 넷의 올리브는 동료 교사인 짐 오케이시와 사랑에 빠졌다. 헨리를 버리고 함께 도망치자고 하면 그리 하겠냐의 짐의 물음에 올리브는 “응” 이라고 대답 할 뿐이었다. 그 둘의 대화 속에 그녀가 짐을 사랑한다는 진실성은 엿보이지만 사실 얼마나 진지한 대답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실제로 그녀에게 도망치자는 제안을 했다면, 올리브는 역시 사랑하는 헨리와 그와 그녀 사이의 아들 크리스토퍼를 두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짐과 올리브는 사이에는 단 한번의 키스나 신체적 접촉도 없었다. 또한 후에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서 올리브는 헨리 같이 충실한 친구를 떠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위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짐이 사고로 죽지 않았더라도 올리브는 이 일을 마음으로 진통하고 마는 슬픈 기억으로 끝냈을 것 같다. 사실 남편 헨리에게도 마음에만 깊이 담아둔 사랑이 있다. 헨리와 같은 이름의 남편을 잃은 미망인 데니즈. 데니즈는 올리브와는 대조적으로 굉장히 여성스러운 인물이며 헨리가 젊은 시절 운영했던 약국에서 함께 일했던 사이이다. 서로간에 사랑하는 헨리와 데니즈, 올리브와 짐. 여기에서 두 남녀가 사랑해서 가정이라는 결속을 이뤄야만 하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오히려 부조리 한 것은 아닌가 하고 의문이 들었다. 실은 소설의 이 부분에 대해서 가장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다. 소설에서 여러 커플들을 통해 계속적으로 환기시키는 소재이기도 하다. 불륜 혹은 로멘스. 올리브는 짐에 관한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헨리가 아무 것도 모르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올리브가 짐이 사고로 죽은 뒤 몇 날 며칠을 슬퍼했고 과도하리만큼 오열했을때 헨리는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는 아들 크리스토퍼 조차도 어렴풋한 의중을 가지고 있었다. 헨리는 자신의 사랑을 마음속으로만 묻었고, 그녀의 사랑도 묻었다. 가정을 가진 사람에게 새로 나타난 사랑. 이런 생물학적인 불 같은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쿨리지 효과라는 말이 있다. 남성이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서 성적으로 끌리는 현상을 말하는 것인데, 남성들은 다른 외적 요인들이 아니라 그저 새로운 개인이라는 의미에서 끌리는 것이라고 한다. 비단 정도의 차이일 뿐 남성뿐만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내 생각을 결론적으로 적어보자면 ‘진지하게 서로를 사랑했었고 충분히 결혼이라는 제도를 숙고해본 소양이 있는 성인이라면 스쳐 지나가는 사랑에 대해 가정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된다.’ 결국 욕망과 순간적인 감정에만 치우친 사랑이 아니라 진실된 의미의 사랑은 믿음과 노력, 추억으로 숭고하게 연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순 아홉 올리브의 6월은 힘든 달이었다. 병원에서 만난 총기강도에 의해 키터리지 부부는 화장실에서 손이 꽁꽁 묶인 체로 끔찍한 경험을 했다. 총부리가 자신의 머리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그에게, 그는 다시 그녀에게로 서로의 가슴 깊은 곳에 상처를 내는 비수 같은 말들을 내 뿜었기 때문이다. 올리브는 신실한 기독교인인 남편에 대해서 비방하며 물어 뜯었고, 헨리는 아들이 떠난 것은 그녀가 아들의 인생을 접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부부가 서로의 마음 속에 남긴 상처는 큰 흉터로 남게 되었다. 왜 조금 더 마음에 여유를 가지지 못했을까? 상황이 너무도 그들을 깊이 조여와 생각의 속도보다도 내뱉는 말의 속도가 빨랐던 것 같다. 나는 온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죽음을 맞이 하는 것이 참으로 아름답고 죽음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모습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올리브였다면 죽게 될 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 평생을 같이했던 배우자에게 더욱 아름다운 말들을 해줬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오래된 영화가 되어버린 ‘타이타닉’ (글 작성 당시 2010년 후반에는 오래되었으나 지금 2012년 전반기에는 3D로 재출시되었다.) 에서 배가 침몰하는 가운데 서로를 껴안고 있던 노부부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오버랩 되는 순간이었다.

헨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던 날. 크리스토퍼는 남편과 손수 만들어 가꾸어 놓은 아름다운 집을 버리고 이미 캘리포니아로 떠나버린 뒤였다. 올리브는 혼자가 되었다. 헨리는 앞도 보지 못하고 말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 때문에 그녀는 사랑스럽게 키운 아들이 왜 자신을 미워하게 되었는지 더욱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생각대로 크리스토퍼의 전 부인 수잔 때문도, 아들을 도와주고 있는 정신과 전문의 때문도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잘못은 그녀에게 있었고 서로의 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그녀가 망쳐버렸다.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녀가 나빴다기보다는 조금 괴팍했고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자신은 사랑으로써 한 행동이 크리스토퍼에게는 견디기 힘들고 괴로웠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어야만 했다. 남일 같지 않게 요즘에는 빠르게 변해가는 가치관의 차이 때문인지 그저 환경이나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부숴져 버린 가정이 참 많이 있다.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다만 사람들이 너무나 바쁘고 힘들어서 조금 소홀해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방법은 그저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 피는 물보다도 진하지만 우리 몸에 흐르는 것 중에 가장 진한 것은 땀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서로 보듬어 가다 보면 언젠가 서로의 마음을 다시 열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크리스토퍼도 올리브도 아직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여러 가지 장애물로 서로가 불편할 뿐인 것이다.

시간이 흘러 결국 올리브의 소중한 친구이자 선량한 남편. 헨리도 세상을 떠났다. 올리브에게는 자신에게 맞는 자리가 필요했다. 그 자리에 놓여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자리. 때문에 여러 가지 일들도 해보았지만 다들 허사로 느껴졌을 뿐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잭커니슨. 올리브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해 도움을 준 공화당을 지지하는 재수없는 노인이다. 그는 아내를 잃었다. 레즈비언의 딸과의 관계도 좋지 않다. 비슷한 상처와 비슷한 지옥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서로의 곁에서 자기의 자리를 발견했다. 올리브 말대로 예전이라면 결코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을 두 사람이 말이다. 내가 나이가 들어 올리브의 나이가 되면 내 노년의 위로를 어디에서 받을 수 있을까? 전혀 모르겠다. 안다고 이것 저것 말한다 해도 실은 거짓말일 것이다. 내게는 아직 잃어버릴 동반자도 자식도 없을뿐더러 달려온 길보다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 길어 보인다. 다만 언젠가는 헤어지게 될 부모님을 생각하면 그 때의 기분이 노년의 상실감과 비슷할까? 그리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이 약해져만 가는 신체적인 한계를 느끼게 되면 이제는 내려갈 때라는 걸 인정 할 수 있을까? 답은 없어도 언젠가 그 날이 오리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솔직히말해 내가 올리브가 되어서 생각해보는 과정은 그냥 다른 인물을 심도 있게 이해하고 호응하는 것보다도 그녀의 삶에서 배운다고 말하는 게 맞는 표현인 듯 하다. 삶에서는 사소한 것 하나 하나가 만만치 않고 높은 벽들 투성임에도 꿋꿋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사람들과 소설 속 올리브를 보면 사람이란, 인생이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눈뜬 자들의 도시

읽은 지 꽤 지난 책입니다.
관련해서  ‘눈먼 자들의 도시’를 부대에 있을 때 먼저 읽어봤어요. 읽을 만한 책이 별로 없어서 찾다가보니 영화 제목으로 봤던 책이 있더라고요. 냉큼 집어들었죠. 덕분에 굉장한 책을 읽었다는 느낌입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나중에 영화를 구해서 보고 나서 함께 포스팅 해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는 잊고 있었는데, 이 책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 엥??!? 패러디물인가…?’
그런데 JOSE’ SARAMAGO가 당당히 찍혀 있는게 아닙니까? 아… 속편이구나.

눈먼 자들의 도시에 있던 사람들이 눈을 떴습니다. 말 그대로 눈뜬 자들의 도시입니다.
저는 눈이 멀었던 사람들이 그 사건에서 잃게 된 것들과 얻은 교훈들. 거기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얘기라고 혼자 상상했습니다.
예. 아닙니다.  (-.ㅡ  )
이번에는 이 도시 사람들이 무효표를 마구 마구 던집니다. 차라리 투표를 안하면 좋으련만 사상초유의 무효표 때문에 사단이 벌어집니다. 정치 권력의 힘과 그에 따라 개인이 얼마나 무력하게 언론과 정치사회에의한 실명을 하게 될 수 있는 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작의 주인공도 등장합니다.
주제사라마구의 책을 읽고나면 가슴이 탁 하고 막히는 기분이 드네요. 아…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맹목적으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 시대에, 나이가 들면서 젊었을 때 꿈꾸던 것과는 달리 돈도 많이 벌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를 만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그들도 열여덟 살 때는 단지 유행의 빛나는 횃불이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모가 지탱하는 체제를 타도하고 그것을 끝내 우애에 기초한 낙원으로 바꾸어놓겠다고 결심한 대담한 혁명가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온건한 보수주의 가운데 어느 것 하나로 몸을 덥히고 근육을 풀었다. 따라서 그들이 과거 혁명에 애착을 갖던 것처럼 지금 애착을 갖고 있는 그 신념과 관행들은 시간이 흐르면 가장 외설적이고 반동적인 종류의 순수한 자기중심주의로 변해갈 것이다. 예의를 약간 걷어내고 말을 하자면, 이런 남자와 이런 여자들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거울 앞에 서서 매일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라는 가래로 과거의 자기 모습이라는 얼굴에 침을 뱉고 있다.

유일하게 계속 기억에 남는 문구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온건한 보수주의 가운데 어느 것 하나로 몸을 덥히고 근육을 풀었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에 익숙해지면서 몸을 덥히고 근육을 풀어서 세상의 부조리에 익숙해 지는 건 아닌가 생각이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