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트로이메라이

슈만의 Träumerei는 독일어로 공상, 몽상등을 일컽는 단어이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트라이메라이는 단순한 연주라기보다는 한 편의 인생 이야기 같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난 뒤 여든이 넘어서야 고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된 호로비츠. 자신의 천재성은 체제 선전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그 상황 속에 호로비츠는 고향 땅에서 연주하는 꿈을 꿀 수나 있었을까?

슈만이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면서 만든 곡인 트라이메라이를 연주하는 호로비츠의 심정은 어땠을까.

한 노인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그의 얼굴에 내리는 듯하다.

스타크래프트

올 8월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발매일을 시점으로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와 스타크래프트2의 캠페인을 재미있게 즐겼다.

예전에 클리어했던 ‘자유의 날개’는 기억을 되살려줄 정도의 캠페인만 선별적으로 골라 플레이했기에 정주행이라고 부르기에 조금 모자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의 나는 취미 생활을 흩뿌려놓았다고 말할정도로 여기저기 흥미가 많은지라 취미가 뭐냐고 물었을 때 오히려 대답하기 곤란한 편인데 스스로가 스타크래프트 덕후라는 점은 매우 힘주어 말할 수 있다.

어릴 적에 도깨비 시장에 가서 여러가지 게임들과 데모 버전이 뒤섞여 있는 CD만 구입하던 내가 난생 처음 구입한 정품 타이틀이 바로 스타크래프트 오리지날이었다. 조그마한 아이가 큰 타이틀을 끌어안고 엄마한테 앞으로 다른 어려운 부탁은 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던 풋내나는 기억이 막 떠오르는 참이다. 그러고보니 그 시절 기억 속에서는 엄마도 참 젊었다.
함께 동봉된 메뉴얼을 수차례 읽었기에 보통은 잘 모르는 스타크래프트 세계관에도 유달리 관심이 많았다. 요즘에야 덕질하기에 좋은 콘텐츠가 여기저기에 넘치지만 그 때는 개인들이 나모웹에디터로 어설프게 만들어 여기저기 깨지기 일수인 홈페이지에 자료를 읽고 또 읽고 매일 매일 방문하면서 새로운 정보가 업데이트되기만을 기대하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어느 책방에서 스타크래프트 관련 소설을 찾았다. 그 내용이 공식 설정과 많이 달라서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책을 놓았는데 지금 보면 그게 일종의 동인지같은 것이었나보다.

시간이 흘러 스타크래프트2의 발매 소식을 들었다. 난 제4의 종족 젤나가가 나오기를 마음 깊이 기대했었다. 단지 친구들과 대전만 즐기는 수준을 넘은 진성 덕후였으므로 내가 알고 있는 세계관 속의 그들을 조작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에 한스타를 통해 싱글 미션도 틈날 때마다 플레이했던 기억이 난다. 영어를 잘 못해서 그저 눈치로만 상황을 느끼며 해보기도 하고, 다시끔 한스타를 통해 플레이해고,중간 중간 추억을 되살려보기 위해 플레이도 해보고…
그리고 이번에 한국 성우들이 녹음한 리마스터 버전까지 싱글 미션을 꽤나 많이 플레이해봤다.
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과 리그도 만들어서 방과후에 경기도 하고, 다른 반 친구들과 게임으로 교류도 많이 했다. 매번 방학 때면 브레인 서버에서 래더 아이디를 걸고 길드를 부수고 다니는게 취미이기도 했다. 정말이지 스타크래프트는 내게 정말 의미있는 게임이다. 유치하고 순수한 내 어린날에 이 녀석이 함께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세대에 나와 같은 사람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피씨방을 주 무대로 스타크래프트 – 디아블로 – WOW순으로 옮겨나는 블리자드의 학업 망테크를 탄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야 디아블로를 한참 하다가 컴퓨터 사양에 부딫혀 스타를 계속 한 것이 중학교 교우관계까지 연결되어 스타크래프트의 고인물 한 층을 담당하게 됐다.

리마스터와 스타크래프트2 캠페인에 대한 감상은 다음에 이어 적도록 하겠다.

지그문트 그로븐 하모니카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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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전당 IBK 챔버홀에서 하는 지그문트 그로븐( Sigmund Groven) 하모니카 콘서트에 다녀왔다.

나는 하모니카 연주가 낯설다.
어렸을 적 외갓집에서 하모니카를 발견하고 외삼촌들에게 몇 번 불어달라고 졸라서 짧은 몇 마디의 음을 들어봤던 게 전부다. 나도 하모니카를 조심스럽게 몇 차례 입에 대보기는 했지만 그 뿐이었다. 그 하모니카는 그다지 위생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머리속의 하모니카는 ‘삑삑-‘터져나오던 외마디 기억이 전부이다. 그런데 하모니카로 콘서트를 한다니… 포스터 속 할아버지1는 얼마나 대단한 연주를 하기에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결과적으로 썩 좋았다.
사실 1부는 좀 무료하게 흘러갔다. 교양머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처음 잠시 동안은 노르웨이 할아버지가 옥수수를 힘차게 입에 물고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 새로운 악기에게 머리 속 공간을 내어 줄 시간이 좀 필요했던 것 같다.
스스로에게 “악기란?”이라는 질문을 던지면 난 크게 아래와 같은 추상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피아노(건반악기). 물방울 위를 통통 뛰며 걸어가는 애들.
바이올린(현악기). 구슬프게 우는 애들.
드럼(타악기). 심장 소리처럼 뛰는 애들.

그런데 그 동안 내게는 관악기에 대한 이미지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모니카 연주를 들으며 ‘이 음색은 무엇과 닮아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우선 하모니카도 처연하게 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모니카는 소년과 목동들의 발랄한 도구라는 내 머리 속 벽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그리고 때로는 청명하게. 하모니카는 새들의 지저귐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1부 말미에 아리랑을 들으면서부터는 그저 음악 그 자체만을 온전히 들을 수 있었다. 국악 소녀 송소희를 옆에 데려다놓으면 정말 멋질 것 같았다.

2부는 아코디언 연주와 함께 시작되었는데, 멋진 신사2가 갑옷처럼 아코디언을 두르고서는 등장했다. 오른손으로는 건반을 현란하게 두드리고 왼손의 베이스로는 웅장한 숨을 토해냈다.
쫙 빼입은 검은 양복만큼이나 기럭지도 쫙 빠져서 양손으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모습이 마치 좌청룡 우백호를 채찍처럼 휘두르는 전사같아 그저 숨죽여 지켜보았다.
게다가 터키 행진곡3이라니! 운동할 때 듣는 리스트 중 하나라 매일 듣는 곡인데 여기서 만나다니 반가움과 감동이 밀려들었다.

다른 하모니카 연주곡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은 노르웨이의 민요인 Varsog였다. 이 곡은 우리에게 익숙한 곡이기도 한데, Henning Sommero를 시작으로 Multicyde – A Better Day. 그리고 한국에서는 JTL – A Better Day로 이어지는 곡이다. 어려서부터 이 곡의 전주가 너무 좋아서 원곡까지 찾아 듣고는 했었는데 여기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어느 힘든 날 고개를 들어보니 너무도 아름다운 석양을 하늘에 걸려있는 걸 보았을 때 느낀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참고로 나는 세 곡 중에 Multicyde의 곡을 제일 좋아한다.

그렇게 멋진 공연을 마치고 두 차례나 더 앵콜 무대를 보여준 하모니카 할아버지께 경의를 표한다.

연주를 듣고 나오는 길의 음악 분수에서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나오고 있었다.


  1. 지그문트 그로븐은 노르웨이에서 1946년에 태어났다. 한국 나이로 이미 70대이다. 
  2. 마티나스 레비츠키(Martynas Levickis) 
  3. Mozart Piano Sonata NO. 11, 터키풍으로 혹은 터키행진곡으로 불린다. 

에투알 갈라쇼(Gala des Étoiles)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16관, 2016년 6월 14일 19:00

라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에투알 갈라쇼(Gala des Étoiles)를 보았다.
에투알 갈라쇼는 MOOV Culture – Opera in Cinema 시리즈 중 하나로 상영 정보는 콘텐숍에서 확인가능하다. 처음에는 이름이 예뻐서 신사역의 브로드웨이로 가려고 했는데, 상영관이 작다는 얘기를 듣고 롯데월드몰로 갔다. 서울에서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월드타워, 홍대입구가 접근성이 좋은 것 같다.

Opera in Cinema

 

에투알 발레 갈라쇼는 2015 밀라노 세계 박람회 폐막을 축하하기 위한 공연이다.

감상 전에 간단히 갈라쇼 프로그램의 제목만 살펴보고 갔다.
초심자로서 새로운 것을 접할 때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느끼는 그 첫느낌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이다.

<카르멘>, <돈키호테>, <로미오와 줄리엣>, <스파르타쿠스>등의 대중적인 것들이 눈에 띄었다.

몸이 피곤한 하루였던지라 처음에는 잠이 올 것 같아서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병든 장미>를 보면서부터 서서히 집중이 되기 시작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왜 저렇게 빙글 빙글 도는 걸까?’ 라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그 모습에 어떤 객관적인 미가 있을지 찾고 있었다.
그런데 음악에 취한 탓인지, 아니면 배우들이 보여주는 기예에 가까운 몸놀림에 경탄을 했기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터 그 모습이 아름다워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부분이 아름답다고는 딱 잘라 말하지 못하겠다. 발레라는 장르를 보는 눈이 부족하기 때문에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아름답다 혹은 우아하다,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멋지다.’라는 생각을 했다.

특히 돈키호테의 이반 바실리예프(Ivan Vasiliev)는 마치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정말 순수하게 저런 몸놀림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경탄했다.
그외에는 <카르멘>의 연기와 <빈사의 백조>, <병든 장미>등이 맘에 들었다.

다음번에는 더 심도있는 감상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스스로에게 기대해본다.

참고로 이건 백스테이지 라이브 영상

에투알 갈라쇼 프로그램
<세개의 서곡 THREE PRELUDES> 루치아 라카라, 말론 디노
<마농 L’HISTOIRE DE MANON> 멜리사 해밀턴, 클라우디오 코비엘로
<병든 장미 LA ROSE MALADE> 마리아 아이히발트, 믹 제니
<그랑파 클래식 GRAND PAS CLASSIQUE> 알리나 소모바, 레오니드 사라파노프
<카르멘 CARMEN> 폴리나 세미오노바, 로베르토 볼레
<빈사의 백조 LA MORTE DEL CIGNO>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돈키호테 DON CHISCIOTTE> 이반 바실리에프, 니콜레타 만니
<이슬비 LIGHT RAIN> 말론 디노, 루치아 라카라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E GIULIETTA> 마시모 무루, 마리아 아이히발트
<스파르타쿠스 SPARTACUS> 마리아 비노그라도바, 이반 바실리에프
<프로토타입 PROTOTYPE> 로베르토 볼레
<해적 IL CORSARO> 레오니드 사라파노프,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시간의 춤 LA DANZA DELLE ORE>

동치미

2016년 6월 10일 오후 3시, 대학로 예그린씨어터.

아내를 따라 6일만에 세상을 버린 어느 시인의 실화를 담아냈다고 한다.

나로서는 그것이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노부부들은  한 분이 세상을 달리하면, 남으신 분께서도 쉬이 돌아가시는 것을 실제로 듣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별이라는게 세상의 순리인 줄 알면서도 작은 이별조차도 마음에 얼룩을 남기는 게 사람의 정이다. 하물며 한 평생을 함께 한 그(녀)의 잃은 고통은 얼마나 클 것이며, 세상의 살아가야 할 큰 이유가 저물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한번은 그런 적이 있다.
암으로 투병하시는 외할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맘이 쇠하여 몸까지 약해질까봐 비밀로 했기에 그때 당신께서는 암에 걸린 것을 모르셨는데

“내가 몸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아. 얼마 살 것 같지가 않아. 그런데 너이 할머니을 두고 어찌 죽냐. 어찌 죽어. 너희 할머니 나 없으면 안되는데.  나도 너 할머니 없으면 못 살고. 그래서 어떻게든 아파도 참고 참고 살아야 하는데.

우린 같은 날 죽어야 해”

이 소리를 듣고서 너무 가슴이 아파 소리를 내지 않고 채 눈물을 흘리는데, 당시에 합병증으로 외할아버지 눈이 잘 안보이시던게 그때만큼은 그리 고마울 수가 없더라.

실은 나도 비슷한 맘을 가지고 있었기에 놀라운 면도 있었다.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는 각자의 믿음과 선호라는 것이 있다지만, 그래도 진짜 사랑이라는 단어에는 설렘이나 욕망이라는 치기어린 가치가 아닌 믿음이나 숭고함이라는 더 격이 높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그래서 아무나 닿을 수 없고,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에서 한번 추구해 볼만한 가치라고.

아무튼 그렇게 공감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는지 정말 감동적으로 보았다. 사실 영화든 극이든 뮤지컬이던 콘텐츠를 계속 접하다 보면 연출이라는 부분이 저절로 눈에 익어서 마음으로만 ‘슬프다 슬프다’하고 마는 경우가 있는데, 정말이지 눈물이 나왔다.

정말 소중한 게 뭔지도 모르는 자식들이 미웠고, 자식을 위해서 자존심도 돈도 내어주는 아버지가 영민하지 못해 보여 미웠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고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가 최우선인 어머니가 미련해보여서 미웠다.

하지만 또 그 모습들이 주변의 현실들과 겹쳐보여 미워도 도무지 미워지지가 않았다.
두 노부부가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툴툴대는 얼굴 위로 드러나서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미운 맘과 사랑스러운 맘이 섞이어 그냥 슬펐다.

가족들에게 잘해야지.

  •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기에도 인생은 참 짧다’라는 얘기도 기억에 남는다.

엄마가 낳은 숙이 세 자매

※ 극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감상 예정이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대학로 선돌극장, 2016년 6월 08일 오후 8시.

치매 걸린 어머니와 세 딸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전 정보만 얻고 관극을 했다.
나 역시 치매를 앓으셨던 할머니와 수년간을 힘겹게 보낸 경험이 있기에 특별히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치매는 장치이고, 이 극은 상처에 관한 이야기이다.
상처가 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뿐만 아니라, 해소되지 못한 상처 위에 적당히 거죽을 덮고 또 다시 덮어서 종국에는 거기에 찬 고름이 스스로를 서서히 확장시켜나가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제 속내를 한꺼풀, 한꺼풀 벗겨 보여준다.
나는 처음 극이 시작하고 엄마와 세 딸이 처음 등장할 때, 제 정신이 아닌게 대체 누구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하나… 둘… 셋. 넷?’
그도 그럴 것이 세 딸들은 엄마 점순이에게 점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점”은 하나의 상징인데, 나는 이것이 상처와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나이를 들어가면서 스스로가 싫어했던 부모님의 모습을 닮아간다고 하지 않은가. 가족간에는 상처가 유전된다는 말처럼 해소되지 못한 고통은 흑사병과 같은 위험성이 있다.

그 시작은 어디일까?
아마도 극의 종반에 드러나는 점순이의 성폭행 피해 경험일 것이다. 그래도 점순이는 남편 명식을 만나 새로운 꿈을 꾸었다.
명식이 해외로 나간 틈에 중국집 주인 놈에게 범해지기 전까지는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일정보다 일찍 돌아온 명식에게는 뜻 모를 칠삭둥이 딸이 하나 생겼다. 그는 이 사실을 묻었다. 하지만 이 응어리진 아픔을 고대로 묻어두었다가 종종 파내어 다시끔 상기시키고는 했다.
그는 아내를 용서하지 않았고, 둘째 딸이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중국집에서 매번 서로에게 확인시키고는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용서하지 않은 채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점순이는 남편이 사라짐과 동시에 치매에 걸려 미치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세상에 상처 받았고, 발바둥치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고통의 해소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기에 미쳐버림으로서 도망치려고 했다.

TV에서 울려퍼지는 우주 다큐멘터리는 우주의 신비에 대해서 일갈한다.
빅뱅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암흑물질은 얼마나 빠르게 스스로를 팽창시키며 그 심연은 어디까지인지?
한 사람의 끝 모를 고통도 심연과 닮은 구석이 있기에 점순은 그 속으로 ‘훨~ 훨~’날아가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여기저기 다치고 찢긴 세 딸들은 엄마 점순이와 자신들에게 엮은 사슬을 끊어버림으로서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 고통의 줄을 영원히 끊어버리고야 만다.

그토록 원하는 것이었으니 점순이는 훨훨 날아갔을 것이라고 믿는다.

연극 둥지

2016.06.04 토요일 16:00, 압구정 윤당 아트홀

아빠랑 연극 <둥지>를 보고 왔다.
아빠랑 연극을 처음본다. 게다가 아빠는 연극을 처음본다.
영화는 종종 함께 보고는 하는데 취향에 맞지 않으시면, 중간부터 주무시는 일이 빈번해 연극은 어떨지 미리 좀 걱정이 되었다.

아무튼 제일 첫 줄에 앉아서 보았다.
둥지는 조부모와 손자의 이야기이다.
부모님들은 이미 선교 활동을 하러 해외로 나간지 오래고 그 빈자리를 손자가 채우고 있다.
하지만 손자에게 해외로 파견을 나갈 기회가 생긴다. 손자는 LA로 떠나길 원하고, 4분의 조부모님들은 그런 손자를 잡기 위해 며느리감을 구하는데…

나는 연극 주제가 조금은 무거울 줄 알았다. 이별이란게 그런거잖아요…
그런데 그건 오산이었다.
웃긴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웃긴다.
극이 무거워질라치면 또 웃긴다.

웃겨. 웃겨.
아빠도 영화보다 훨씬 낫다고, 좋다고 하셨다.
아빠한테 좋다는 최상급 표현이다.
평소에 “어떤 영화를 함께 볼까?”라고 물으면 “스릴러, 추리”를 좋아하신다고 하시면서 정작 본인 취향은 코메디가 아니셨던게 아닐까 생각된다.

테너 김병오의 토크콘서트

문화역서울 284 (구 서울역사)의 3등 대합실에서 진행하는 <테너 김병오의 토크콘서트>에 다녀왔다.

실은 얼마전 <복숭아 꽃이 피었습니다> 전시를 다녀오면서 문화역서울에서 종종 공연이 있음을 알게되었는데, ‘꼭 한번 가봐야지!’하고 마음을 먹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가보았다.

이전 공연들을 보니 선착순 200석과 같은 제한이 있어서 운이 나쁘면 헛걸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소소하게 객석이 준비되어 있었고, 관객들은 거기에 꼭 맞게 들어찼다.

아무래도 테너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벽이 전에 있던 무대들에 비해 대중에 가깝지 않은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아무튼 나로서는 그런 작고 깊은 성찬이 더욱 좋았다.

무대는 봄-여름-가을-겨울 이렇게 계절을 테마로 김병오씨께서 가곡과 가요를 섞어가며 불러주셨다.
사실 가곡만 해주셨어도 좋았을텐데, 의미와 그 곡의 감정을 몸이 스스로 알고있는 가요가 확실히 더 몰입해 듣기 좋았다.

나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전통 한국인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김병오씨의 표정 연기에 의외로 놀랐는데, 테너는 그저 목소리를 훌륭히 담아 노래하는 사람인줄만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곡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줄 알았다면 평소에 좀 더 우러러보았을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인연>이었다.
피천득씨의 인연 중 한 구절, 이선희씨의 인연을 한 곡 불러주셨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 얼마나 서정적인가.

판타스틱(FANTA STICK)

서대문역 부근에 위치한 NH아트홀에서 국악 뮤직쇼, 판타스틱(FANTA STICK)을 보았다.

평소에 국악에 대해 ‘나름의 매력은 있지만 조금 고리타분 한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것들을 꽤나 해소하게 되었다.

‘우리 악기가 이렇게 신나고 명쾌한 소리를 내다니!’
고리타분하다는 느낌은 우리 악기가 아니라 오래된 형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나 온 사방에 그 웅장함을 뽐내는 북과 공연 말미에 잠깐 본 난타의 두근거림에 흠뻑 반했다.
나는 타악기야 말로 진정 생동감 넘치는 악기라고, 그리고 북이나 드럼을 어디에서라도 배워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며칠 뒤에는 내 손에 스틱이 들려있을지도 모르겠다.

공연 자체는 코믹스럽고, 관객 참여를 유도하는 부분도 많아서 신나게 웃고 박수치면서 즐기다 온 것 같다.

크레센도 궁전 감상기

※ 극의 재미를 위해 스토리는 적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2016년 6월 1일 PM 08:00
CJ AZIT(아지트) 대학로에서 크레센도1 궁전을 보았다.

대학로는 몇번 가보았지만 CJ 아지트는 처음 가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CJ 아지트는 원래 광흥창에 하나 있었고, 올 4월에서야 대학로에 추가로 개관했기 때문이다.

나는 객석 1층에서 관람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무대가 가까워 조금 놀랐다. 무대는 포스터에서 본 분홍 빛을 띄고 있었는데, 중앙에 그네로 보이는 물체가 이목을 끌었다.

예쁜 색감, 그리고 궁전이라는 제목과 어울리는 오밀조밀한 무대와 달리 극은 마냥 예쁜 것만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야기는 어머니와 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버지와 남동생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완전히 실재하는 존재는 아니다. 아무튼 극은 우리가 가정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 일상적이고 익숙한 장면들이 극으로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묘한 우울함과 호기심이 일었다.
‘이런 식으로 완전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공통된 정서가 존재한다는 건. 실제 비슷한 고통을 받는 우리들이 얼마나 만연하다는 걸까’
극에서는 다양한 삶의 문제를 다룬다. 한 가정에 그런 것들을 모두 쑤셔담는게 가당치 않게, 그러나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먼저 찾아오는 것을 보니 불행이란 대게 한 대상만을 쫓아다니는 스토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독한 새끼.

정확하지는 않지만 극 중에 남동생이 이렇게 먹먹히 말했던 것 같다.
“나갈 수 없어. 우린 가족이니까.”
이 대사가 굉장히 무기력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이런 막막한 사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같이 슬퍼하는 것으로 족할까? 위로를 해야하나 아니면 더 나은 삶을 위한 질타를 해야하나. 위로는 값 싸고 상투적이며, 채찍은 세상이라는 놈의 아가리에 대항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기이다.

극이 끝나갈 때 남동생이 다시 말했다.
“너무 애쓰지 마. 그냥 살아있어.”

희망인 듯 아닌 듯. 나도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살아서 가끔씩 찾아오곤 하는 작은 기쁨을 맛 보는게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용기있고 현명한 일일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쨌든 살아있어야 행복이라는 걸 꿈꾸고 도전해볼 수도 있는 거니까.

 


  1. Crescendo : 점점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