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행복도 취하고 무뎌지는 것이라 자꾸 탐하다보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결국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충만하게 행복한 상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행복에 대한 기준을 낮추고 끝없는 만족을 추구하기보다는 가치있는 일을 찾을 필요가 있다.
스스로 가치있다고 여기는 일을 헌신적으로 해나간다면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며 삶의 만족감도 더할 것이다.

※ 한강에 떠오르는 햇살이 참 예쁘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기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어릴 적에는, 몇 시간씩이나 이 짓을 하곤 했다.
그저 하염없이 창 밖에 고정된 건물이나 바삐 움직이는 점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군 시절에는, 거진 매일 이 짓을 해야만 했다.
못해도 일주일에 6일은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적막한 어둠 속을 2시간 내 바라보는 근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면 생각은 무수히 일어나고 정리되어 포개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버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들이 내 삶에 있어 가장 생산적인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데 익숙해진 것 같다. 넓고, 빠른 세상에 발 맞추기 위해서 생각을 달리는 연습을 해왔다. 잠을 줄이고, 더 촉박하게 일하고, 더 많은 것들에 닿기 위해서 바둥거렸다.
그럴수록 누가 했는지도 가물가물하고 상숭생숭한 이력들이 세상이 요구하는 명함에 하나씩 더해졌다. 단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을 뿐인데, 이 길은 잘못된 것임을 이제 알았다.

외로움과 공허함은 낙원으로 스포츠 카의 엑셀을 밟고 들어가 급히 목적지의 여행 스템프를 찍고 돌아온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바깥에 있는 것들이 아닌 스스로에게 집중해야 한다.
타인들의 시선에 재단당하는 것은 스스로 바라보고 있는 지점이 없기 때문이다. 소신이 있는 사람은 타인들의 편견에 부당함을 느낄 뿐이지 의기소침해지지 않는다.

자기 자신과 끊임 없이 대화해야 할 것이다.  욕망에는 솔직하게, 허나 진솔한 가치관을 가지고.
기사들이 누더기처럼 걸려있는 포털사이트나 감흥없는 남들의 자랑거리가 올라오는 SNS를 보는 대신에 오늘 아침 기분은 어땠는지, 직접 해보고 싶은 요리는 없는지, 내 삶을 어디로 이끌어가고 싶은지 물어야 할 것이다.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내게는 두가지 말 버릇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꿈이 뭐야?”

꿈이 뭐야? 원하는 게 뭐야?
“무엇을 하고 살 것 인가?” 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참 어렵다.
막연히 하고 싶은 일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맛있는 것을 먹는 것. 노는 것. 이런 것들은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이다.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남들에 비해 특별히 내가) 하고 싶은 것’일 것이다.
‘아니, 그래도 난 노는게 세상에서 제일로 킹왕짱 무지무지 하고 싶은걸?’
하지만 금수저를 타고나지 못한 우리는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금수저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더 이상 이 글을 읽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그냥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데 시간을 써라. 내가 당신이라도 그렇게 할 테니까. 이 글에서 삶의 이유에 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아무튼 여전히 먹는 게, 노는 게 좋다면… 어마어마하게 먹어라. 세계 최고의 푸드파이터가 되건, 너무 맛있게 먹어서 먹방계의 초신성이 되건, 밤새 게임을 해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던지 해야 할 것이다. 적당히 하는 건 누구나 좋아한다. 그 당연한 것들 속에서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어설픈 자세로는 힘들 것이다.

‘그건 평범한 직업을 갖는 것보다 힘들 것 같아.. 나 그냥 적당히 일하면서 취미로 하고 싶은 거 할래.’
그래. 잘 생각했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몇가지 문제가 있다. 헬조선이니, 지옥불반도니하는 별칭을 지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청년들은 5포세대라고 하고, 노인들의 빈곤/자살율은 OECD국가 중 1위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딱히 스스로의 처지에 연민을 가지거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 남녀노소 힘들게 살고 있는 대한민국조차 전 세계에서는 살만한 국가에 속하니까 말이다. 객관적으로 보아 전 세계에는 불행한 환경에 놓인 사람이 다수이고, 행복을 꾸려나갈 수 있는 환경에 놓인 사람이 극소수이다.
그래서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벌 수 있는 환경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게 아니다. 적당한 환경속에서 올바른 지침을 따라서 살아왔다고 해도 그건 어느 정도 운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최선의 안정성을 추구해 옳다고 여겨지는 지침을 따르되 나머지는 운에 맡겨야 할까?’
내 의견은 다르다. 이 짧은 글에 자세히 적지는 않겠지만 난 ‘안정성’을 일종의 허구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 세대는 대부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대한민국에 마지막 전쟁이 일어난지는 고작 60년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도 전 세계의 곳곳에서 사람들이 총탄에 희생되고 있다. 스마트폰이 등장한지 10년도 되지 않았지만 세상은 물이 흐르듯 당연하게, 동시에 빠르게 변해간다. 지금으로부터 20년 뒤를 예측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하물며 당신 인생의 안정성을 어떻게 따져볼 수 있을까?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과 다르게 평생을 발전하고 변화하는데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만약 당신의 내 의견에 동의한다면, 이제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의 미래를 인질삼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그것들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테니까.

게다가 내가 느끼는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서 성공할 자신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괴로워하는 일을 하면서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고작 버텨내는 것이 전부일 뿐이며, 보통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황금 낙원은 없다. 심지어 객관적인 모든 것들이 보수적인 직업을 선택하도록 종용한다고 해도 인생의 막바지에가서 반드시 후회할 하나의 선택을 하고 있다는 건 변함이 없다. 나는 당신이 심장을 뛰게 만드는, 하루를 더 살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 백번 옳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잘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뭔지 모른다는 데 있다. 나 역시 대부분의 대한민국 학생들이 지내온 학창시절을 보내왔기에 스스로에 대해서 너무도 무지했다. 그 후 20대의 대부분을 스스로에 대해 탐색하며 보냈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앞으로의 삶에 대해 중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조건들이 몇 가지 생겼다. 내게 가장 걸맞다고 믿었던 일들에서 환멸을 느꼈고, 스스로가 혐오하던 것들 중 일부는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납득할 수 있는 것들도 생겼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이 이럴 때는 밉지 않다.

새로운 변화를 원하는 나와 우리 가족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좋은 일이 가득하기를.

정보의 과잉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정보가 잔을 흘러 넘친다.
속이 부대껴 순간에 집중할 수가 없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무시하고 넘어가는 일들이 많아야 한다. – 랄프 왈도 에머슨

바로 내가 그렇다. 나름의 인내력을 발휘해 밀려오는 정보들을 막아보지만 종국에는 제 크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린 통처럼 정보들이 흘러내린다.
물론 두고 보면 언젠가 티끌만한 효용이 있을법한. 그럴듯한 변명으로 위장한 정보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보는 필요할 순간에 가서는 이미 낡은 것이거나, 혹여 바로 그 정보가 필요하다고 해도 금새 다시 찾을 수 있다.

스스로의 진료일지와 같이 개인적이고 추후에 반드시 쓰일 정보가 아니라면 모으지 말고, 소비하지도 마라.

스스로를 위한 실천적 방법

  •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를 제한적으로 사용한다 ; 온라인 커뮤니티는 오프라인 커뮤니티보다는 사교의 밀도도 떨어지고, 예상치 못했던 정보들이 난립한다. 이 정보들은 객관성도 보장 할 수 없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해당 정보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순간에 일시적으로 이용하도록 한다.
    현실세계와 SNS의 교류는 많이 다르다. 다양한 서비스의 SNS를 살펴본 결과 매니저가 아닌 일반인이 SNS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유희외에 없다.
    즉, 무작정 인터넷을 항해하는 것을 제한한다.
  • 내가 그것을 소비하는 목적을 명확하게 해라 ; 어떤 콘텐츠를 접한다면 유희가 목적인지 혹은 무언가를 배우거나 알아내려는 것인지 명확하게 해라.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는 없다. 적당한 재미와 적당한 정보를 동시에 섭취하는 것보다, 일처리는 빠르게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온전히 즐기는 편이 경험상 유용하다.
    목적을 명확하게하면 일이 잘못되거나, 내가 흥미를 잃었을 때를 빠르게 캐치하고 벗어나는 것이 가능해진다.
  • 한번에 진행하는 서브 프로젝트의 숫자를 2~3개로 제한하라.
    생각의 흐름은 바이러스와 같아서 신경쓰지 않으면 자꾸만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명상을 하듯 주된 목표에서 삶이 틀어져나가는 것을 인식하고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기를 반복한다.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몸에 익혀야 하는 습관이다.

필기, 디지털 필기의 필요와 활용방식

펜과 노트.
글을 적을수도 있고, 그림을 그릴수도 있습니다.
이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고전적인 기록 방식 중 하나입니다.

필기는 아주 개인화된 정보입니다. 순간적인 생각의 포착, 무언가를 하고 얻은 감상, 체계화된 지식의 개인적인 외적 구성, 일정등이 노트에 포함됩니다.
사실 이런 개인적인 정보들을 온전히 자신의 두뇌만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남에게 내 생각을 들킬 염려도 없고, 따로 필기구를 소유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의 두뇌는 쉽게 망각하며, 여러 생각을 한꺼번에 잘 처리하지 못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 장거리가 무엇인지 기억하는 일은 우리 삶에 필요하긴 하지만 반드시 머리로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필요한 순간에 해당 정보에 접근할 수 있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에 필요하지 않은 생각과 기억들을 덜어 내 깨끗하게 정리된 생각의 공간은 우리에게 여유를 주는 것과 동시에 명쾌한 사고를 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필기”란 나중에 유용하게 쓰일지도 모르는 생각 조각들을 압축해서 필요할 때 즉시에 찾아볼 수 있는 제 2의 두뇌 창고로 옮겨 운영하는 행위입니다.

 

현대로 오면서 필기 역시 단순하게 종이에 잉크로 옮겨적던 손 필기(아날로그)에서 “디지털 필기”로 진화해갑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정보를 작은 칩 안에 구겨 넣는데 성공했고, 통신의 발달로 저장된 정보에도 언제 어디서나 접근가능해졌습니다. e -book을 통해 거대한 도서관 전체를 손바닥만한 태블릿에 담아 가지고 다닐수도 있고, 각종 클라우드 서비스를 통해 평생동안 찍은 영상과 사진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디지털 정보의 특성과 소프트웨어의 발전으로 인해 디지털 필기는 아날로그 필기에 비해 다음의 강점을 가집니다.

  1. 저장공간의 제약이 없다.
  2. 정보의 접근성이 높다 (어디서나, 쉽게 검색해서).
  3. 수정이 쉽다.

위에서 제가 언급한 내용은 별로 어려운 내용은 아닙니다. 단순히 전자문서화의 특징을  다시 한번 언급한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러면 현 시점에서 각 개인이 디지털 필기(개인화된 메모)를 어떻게 운영하는 것이 좋을까요?
오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 것입니다.

컴퓨터 시대로 오면서 우리는 메모의 종류를 몇 가지 방식으로 분화시켜 살펴볼 필요를 느끼게 되는데, 이는 타이핑이라는 새로운 입력방식과 영상/음성의 기록덕분입니다.
타이핑은 손으로 적는 것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글의 입력이 가능합니다. 대신 이미지를 그려낼 수는 없죠. 여기에서 1차적인 분화가 일어납니다. 전에는 자유롭게 사용하던 그림과 도식등의 이미지를 극히 제한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음성 녹음과 동영상 녹화 역시 새로운 정보 저장의 형태입니다. 단언컨데 보고 듣는 것은 글을 읽는 것보다 체감도가 높습니다. 기록할 때는 더 빠르고 받아들일 때는 더 실감이 나죠.
영상이건 글이건 가공하는데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고, 각기 장단점이 있으니 무엇이 더 좋다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디지털 메모를 단순히 타이핑 방식(전자 문서화)으로만 이용하는 것보다는 각 쓰임에 맞게 사용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1차적으로 메모를 할 때는 Keep(구글 킵)에 하고 때에 따라서 플로팅 메모가 필요하면 1초 메모(갤럭시 노트를 사용한 이후로는 삼성노트)를 이용합니다.
이것들을 다시 가공한 사진 + 음성 + 간단 도식 + 타이핑 정보는 검색이 용이한 Evernote(에버노트)에 저장하고, 큰 캠퍼스에 시각화가 필요한 아이디어 스케치나 압축 정리된 마인드 맵은 Onenote(원노트)에 저장합니다. 데이터를 가지고 가공 작업이 필요한 경우에는 Notion(노션)을 사용합니다. 동영상의 경우 아직 저의 쓰임이 한정적이라 Youtube(유튜브) 저장하고 링크를 에버노트로 따오는 형식으로 운영합니다.

결정론에 관한 아주 개인적이고 조악한 글

올 한해 내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던 화두는 ‘결정론’이다.

나는 본디 운명따위는 믿지 않는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노력의 가치를 신봉하며 자랐고, 또한 늘 과해보일 정도로 목표에 집중하며 삶의 길을 내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욕심은 많은데, 타고 난 것이 없으니 운명 따위 엿이나 먹으라며 그저 그렇게 된 것이다.
아무튼 보통 사람들이 운명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과학자들은 결정론이라고 부른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내리 깔아보는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어려서부터 신은 없다고 생각해 왔다. 머리가 굵어가며 차츰 사회의 부조리함에 익숙해졌는데 이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근거가 되었다.
권선징악은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같은 역량을 가진 선과 악이 대결을 펼친다면, 단연코 악이 승리한다. 악하다는 것은 결과에 이르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이 선하기 때문에 절대 사용할 수 없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 이타적인 가치를 신봉하는 것이 더 고되고, 나쁜 결과를 낳는가? 그렇다면 신의 가면 뒤에는 악마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인가? 그래 그럴바에 신은 없는 편이 낫겠지.

하지만 어느날 신 존재증명을 읽고 난 뒤에 세상의 정점에 뭔가가 있어야만 할 것같은 쎄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은 아니다. 굳이 밝히자면 나는 불가지론자이다. 다만 인간은 우리 세계 바깥에 대해서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일단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며, 우주 너머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은 짧은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만 고민하는 게 좋겠다고 나의 11살 일기장에도 적혀있다.

그러면 운명도 믿지 않고,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말자는 주의인 내가 왜 결정론을 가지고 이토록 고민을 하게 된 걸까?
내가 이성적이라고 그리고 현 시대에서는 가장 진실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고 믿는 물리학자 중 일부가 결정론을 지지한다는 사실에 큰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믿음’이 아닌 증명가능한 ‘근거’를 바탕으로 생각하는 과학자들이 결정론을 지지한다?
물론 현대에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미시적 영역에 대한 불확실성을 근거로 결정론이 입지가 크게 줄었으나, 여전히 결정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아직 밝혀내지 못했을 뿐, 모든 것에는 규칙이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넘어가 하마터면 결정론자들의 의견에 삶을 저당잡히고 침몰할 뻔했다. 다행인 점은 그들의 의견 역시 믿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 어느 누구도 모든 것에 예측가능한 규칙이 있을 것이라고 천명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런 믿음은 그저 인격신이 있다고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나의 이런 글을 결정론자들이 본다면 내가 자라온 환경과 내가 타고난 기질 그리고 내 기분등 모든 것들에 의한 결과로 내가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말하겠지만 그런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알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믿는 것이 다를 뿐이며, 믿음에 관해서는 서로 터치하지 않는 것이 현실적으로 현명하다는 사실을 많은 종교&정치 토론에서 배웠다.

실은 얼마전 아는 형과 여행을 갔다가 새벽까지 음주 토킹중에 결정론에 관해서 토론 할 재미있는 예시가 하나 떠올랐는데 여기 적어보고 싶다.
한 개인이 어떤 선택을 내리는 일을 가정해보자. 전 우주의 모든 시간을 거슬러 그러한 선택은 무한대에 가깝게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오늘 야식으로 라면을 먹을까? 말까? 하는 선택에 조금의 소숫점 오차도 없는 환상적인 50%:50% 의 시행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까? 단연코? 물론 이런 일은 내가 우연히 빌린 책 속에 1등 당첨 로또가 들어있을 확률보다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희박하지만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을 통틀어 단 한번도 없을 것인가.. 나는 왠지 한번쯤은 있을 것 같다.
그래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한번쯤 있을 것 같다고 믿는다.

‘신은 결코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고 아인슈타인은 말했지만 내가 창조주라면 나는 랜덤함수를 만들어 넣었을 것이다.

사실 모든게 결정되어 있다고 해도 나는 상관이 없다.
나는 아직까지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영화 속의 주인공으로 순간을 살아가는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아서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주체적인 캐릭터로 살아갈 터이니 참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란

문득 생각이 나서 적어보는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

어린 시절 존경하던 어른들의 나이가 되고나니, 그 분들조차 이리저리 흔들리는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동시에 순간 순간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 흩어지는 나날들과 싸우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이제는 그 분들을 어렸을 때만큼 존경하지는 않는다. 대신 전보다 훨씬 더 좋아하게 되었다. 자신을 지켜나가는 모습이 멋있다.

나는 크던 작던 실수가 잦은 편인데, 앞으로도 바보 짓의 연속 일 것 같다. 정말 그렇게 될 것이다. 종종 실수할 것이고, 누군가와는 상처를 주고 받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내 어린날의 이기적인 모습에 얼굴이 붉어질 것이고, 후회로 얼룩지는 날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을 도덕적으로든, 타인의 감정을 헤치지 않는 방식으로든간에 완벽하게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마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보통의 사람이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근래에 특정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는 늘 겸손을 향해 간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문제를 바라보는 이기심을 모두 덜어내고도 한편에서의 정의가 다른 편에서의 정의와 완전히 중첩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 문제에 대해 소신과 겸손한 태도를 갖추고 있을 것. 어떤 문제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정하지 않으면 기계적 중립의 덫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겸손이란 스스로 공격받지 않기 위한 방어적인 태도와 다르다. 내가 지지하는 의견조차 한편으로는 한계가 존재함을 인지하고 있는 자세를 말한다.

  • 다른 존재에 대해 공감, 스스로의 개선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일 것. 나와 닮은 사람이 완벽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저 나랑 비슷한 부족한 사람일 뿐이다. 나와 닮아있다는 사실은 편안함만을 보장한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면 자신과 다른 부분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틀림이 아닌 다름의 영역으로 뻗어나가 스스로를 넓혀 성장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이와 노인이 죽었을 때 어떤 문화권에서는 앞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던 어린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고, 반면 또 다른 곳에서는 노인의 지혜를 잃은 것을 슬퍼한다고.
두 의견 모두 설득력이 있다.

나는 하얗게 태어나 자신의 도화지 위의 그림을 거침없이 고쳐나가는 그런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을 강요받지 않고 정보를 제대로 섭취하기

오늘은 인터넷 여론 알바단에 대한 논쟁글을 봤다.

인터넷 여론 조작에 대해서는 이미 몇 해전 정치 이슈로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나는 그것이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고 점점 고도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본인의 친구 중 한명이 재수 생활을 마치자 마자 구한 일이 모 학원안에서 여론 댓글을 다는 것이어서 오래전부터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또한 내가 운영하는 작은 커뮤니티에도 종종 같은 ip대의 체계적으로 설계된 홍보 게시물들이 적힌다. 그들의 장기적이며, 일반인처럼 보이도록 메뉴얼화된 글을 읽다보면  나도 다른 곳에서 참 많이 속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면에서 모 사건은 아주 멍청한 곳에 외주를 맡겼거나, 본인들이 노하우도 없이 진행한 것이 명백하다.

한번은 ‘언론이 정보를 선별하여 대중을 선동하는 법’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말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A와 B라는 작은 나라에 교통사고가 각각 하루 10번꼴로 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A국의 방송국에서는 매일 한번씩 교통사고가 일어났음을 보도한다. 반면 B국의 방송국에서는 한달에 한번씩 교통사고를 보도한다. 실제로 A와 B의 교통사고 발생 수치는 다르지 않으나 해당 국가의 국민들이 느끼게 되는 체감 교통사고 발생 수치는 크게 차이가 나게된다. 더 나아가보자. A국에서는 교통사고가 하루에 약 10번 발생나고 매일 보도를 한다. 반면 B국에서는 교통사고가 하루에 약 1000번 발생하는데 한달에 한번씩 보도를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작은 교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스스로 파악하여 올바른 사고와 결정을 내릴 수 있겠지만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충분히 크고 벌어지는 일도 매우 많다. 즉, 누군가가 떠먹여주는 정보만을 받아들이다보면 그들이 이미 가공해놓은 생각의 흐름 그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거대 포탈의 기사나 지상파 뉴스, 메이저 신문들을 일체 보지 않는다. 덕분에 몇해 동안은 정치적 문외한으로 살아왔다. 큰 이슈가 터질 때마다 자주 들르는 커뮤니티들의 글들을 살펴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선별된 정보가 아니다. 그곳에도 악의적 목표를 가진 자들이 상주하고, 또한 전혀 심사 숙고되지 않은 감정적 의견들이 난립한다.

결론적으로 요즘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는 다음과 같다.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주는 매체들을 직접 발굴하는 것이다. 특히 유명 블로거들의 글을 좋아하는데 블로거라고해서 다른 매체들에 비해 신뢰성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들도 사회에서는 의사며 기자고 각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몇몇 블로거들은 사건의 흐름을 꿰뚫어 전문가의 시야까지 얹어 깔끔하게 정리해주기도 한다. 물론 글을 쓰는 사람의 의견이 고민없이 그대로 투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능하다면 같은 주제로 2~3개의 글을 읽는 편이 좋은 것 같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내가 구독중인 RSS 목록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한번 공유해보고싶다.

2016.07.10
최근에는 진보 성향 매체의 글들을 좀 보았는데, 굉장히 실망을 했다. 그래서 요즘에는 좋은 글을 발견하면 글을 쓴 사람의 이름을 알아두고 해당 기자를 검색해서 본다. 이제는 매체에 대한 신뢰를 거두고 개인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 같다.
jtbc도 사실은 손석희씨를 믿고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16.07.27
메갈 관련 보도를 보니 jtbc도 크로스체크 안하는 것으로 보인다.
팩트 체크라는 책도 내더만 방송하기전에 사실 관계 크로스 체크도 안하는 걸 보니 저딴 것도 언론인가 싶다. 장담하건데 한국에는 신용할 만한 언론이 단 한개도 없다. 그냥 레퍼런스 체크하면서 직접 알아보는게 낫다.

이성혐오(여혐, 남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생각의 점화는 무한도전의 식스맨으로 거론되던 장동민의 여성 비하 논란에서 이뤄졌다.

사실 이성을 혐오하는 분위기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느끼고, 흥미를 느껴왔다. 몇몇 철학적인 문제들은 고민을 해도 도저히 답이 나올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반면, 이 문제는 치열한 논쟁 뒤에 그 원인과 지향할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해야겠다.

그럼에도 관련된 글을 적기는 쉽지 않다.
나는 남성이라는 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경험적으로나 사고 방식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는 편협해질 수 있다는 성찰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차이를 메꾸기 위해서 틈이 날 때면 관련된 도서를 읽고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자료들을 모아보고는 했다. 그 후 이성 혐오 현상에 대해서(추가적으로 남과 여의 차이) 한 두개의 포스팅으로는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성 혐오 문제는 큰 사회적 문제임과 동시에 태초부터 가장 오래된 두 집단의 감정 싸움을 조장하는 성격을 띄기 때문이다. 그 원인이 어디에서 왔던 감정적으로 격양된 양측 모두를 설득하는 합리적은 글을 짜내기 위해서는 하나 하나의 문장에 수십개의 변이 붙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오늘은 ‘이성 혐오를 대하는 개인의 올바른 자세란 무엇일까?’에 관한 내 개인적 의견에 대해서만 적어보려고 한다.

위에 적어놓은 것처럼 이성 혐오는 남성과 여성 두 집단간의 감정적 싸움처럼 보이는 일면이 있다. 여혐은 남혐을 낳고, 남혐은 여혐을 낳는다.  상호간의 부정적 피드백으로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간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따지는 것은 제쳐두고 스스로 이것을 끊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의 태도를 정하는데 있어서 이성 혐오의 발생원인이 사회/심리학적으로 무엇이 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혹자는 상대 성의 폭력에 대한 피동적인  자세가 아니냐고, 사회적 문제로 바라보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지탄할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누군가와 싸웠다면 서로의 잘못을 인정/이해하면서 사과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오해했던 원인이 사라진다고 해도 관계는 나아갈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선량한 사람들까지 싸잡아 비난하며 서로간에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또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 역시 우리들이기 때문에 관계의 회복없이  사회적 인식을 개선시키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글을 쓰는 재주가 없어 결론을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집단으로 묶어 전체를 비난하는 태도를 가지지 말자.
집단에 속한 다수가 비난받아 마땅한 태도를 가졌다면, 비난의 화살은 그 다수에게 향해야 할 것이다. 죄없는 사람들을 욕하고 싶지도, 또한 누군가를 편협한 시야를 가진 사람이 아닐까 의심하고 싶지도 않다. 반대로 나 역시 편협한 생각에 갇혀 살고 싶지도, 까닭없이 비난 받고 싶지도 않다. 문제의 해결을 지향하고 편협한 사람들의 폭력적 시야에 스스로가 파괴되지 않는 방법은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말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을 괴물로 보지 않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 욕설이나 비아냥이 아닌 건설적인 토론은 지향하니, 저와 다른 생각에 대해서는 언제든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