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숭무대소극장, 6월 25일 16:00
※ 본 글은 극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무대 위에는 작은 면회소가 설치되어있었다.
제목이 면회인만큼 공간을 가로 질러 나누고 있는 탁자가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실은 극의 초반에 감옥이라는 공간 구성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것은 얼추 맞아 떨어졌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감상 콘텐츠는 결국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야기는 재미 또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전하고 싶은 가치를 대변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그것들을 전하기 위한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면회’의 경우에는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가짜 공간을 마련해놓았다.
극의 시작과 함께 남자는 자신이 결혼하려했고, 누군가를 살해한 여자의 면회를 온다.
교도관은 면회를 온 사람들에게 재차 ‘접견’이라는 용어를 주지시키는데 나는 여기에서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극의 배경이 실제 교도소라면 면회든 접견이든 상관이 없지 않을까? 즉, 남자는 접견이라는 용어만 사용가능한 어딘가에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곧 남자가 안에 넣어줄 수 있는 물품에 대해 물었을 때 ‘살아있는 것은 넣을 수 없어요’라는 대답에 여자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남자가 선물로 가져온 것들이 면회실에 계속해서 쌓여가는 것들을 보고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여자의 친구 역시 “예전보다 조금도 더 나이가 들어보이지 않는다.”라고 여자의 죽음을 재차 증명해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자는 본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결혼전에 자살을 하고만 것이다. 남자는 그렇게 죽어버린 여자의 분향소를 계속해서 찾아온다.
2층 317호에 죽음으로 박제된 여자는 말이 없으나, 남자의 마음 속 감옥에 2317번으로에 수감된 여자는 남자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왜 하필 결혼을 앞둔 그녀였을까?
극에서의 결혼은 두 남녀가 도착하지 못한 곳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자의 죽음은 관계의 종말로 볼 수도 있다.
사실 여자가 이미 죽어있었다고 얘기했지만, 극은 전개과정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겪었던 감정의 변화로 여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과정을 우리에게 재현해준다.
즉, 이 극은 남녀간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자는 이야기한다.
“거기는… 아니 여기는…”
이 극은 어떠한 벽으로 나뉜 공간에 존재하는 남녀간의 이야기이다.
여자는 이야기한다.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우리는 종종 상대방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있는 것 같다는 허무맹랑한 착각을 하고는 한다.
하지만 여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상대가 뭘 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진실된 말을 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사실 상대방에게 말해줄 수 있는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 역시 본인이 스스로를 분석한 결론에 불과하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한다.
관계에는 많은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 원치않게 또 다른 이성이 눈에 들어올 수도 있고, 일이 너무 바쁠 수도 있다. 그런 일들이 생긴 건 남자의 잘못이 아니듯, 우리들의 잘못도 아니다.
하지만 ‘세상이 마음을 이끄는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부여한 믿음을 따를 것인가?’ 는 온전히 스스로에게 남겨진 선택의 몫이다. 둘 중에 무엇이 옳다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은 분명 오만한 짓일 것이다.
다만 나는 체로키 인디언의 두 마리 늑대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새겨보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