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조절이 잘 안되면
전전두엽이 고장났나 고민하게 된다.
대신에 한번 참을 때 “켜져라 전전두엽” “일해라 전전두엽” 주문을 외우면 어이가 없어서 진정이 된다.
修人事待天命(수인사대천명), 결과는 내 것이 아니니 오직 믿는대로 살라.
생각, 고민
감정 조절이 잘 안되면
전전두엽이 고장났나 고민하게 된다.
대신에 한번 참을 때 “켜져라 전전두엽” “일해라 전전두엽” 주문을 외우면 어이가 없어서 진정이 된다.
삶에서 중요한 건 태도라는 생각을 했다.
좋은 결과를 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어떤 목표에 투신한다는 것은 자신을 잊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지만, 좋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한 개인이 자신을 완전히 경주한 일의 나쁜 결과를 받는 건 꽤 아픈 일이고, 반대로 그 목표에 겨우 닿아 올라선 뒤의 공허함은 상상외로 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영원히 가득 채울 수 없고 얼마간의 여백은 더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고 항상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을 달래 줄 새로운 목표를 세우거나 그냥 바보같이 멈춰 서 시간을 하염없이 태울수도 있다.
누군가는 한 평생을 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눈을 가린 경주마와 무엇이 다를까. 내일을 갖기 위해 포기한 오늘들은 정신없이 달려온 과거만을 비추어줄 뿐이다.
행복은 즐거운 마음의 합이라는 생각을 했던 때도 있었다.
뭔가를 하면, 뭔가를 가지면 그것들이 계속 쌓여서 만족스럽기만 하루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행복하기 위해 채운 것들은 거짓말처럼 거추장스럽고 갈증만 불러왔다. 반면 아무 기대도 없이 세상을 통해 받은 것들은 아무리 사소한 것들이라도 간직할 만한 것들이 되었다.
우리가 꼭 무언가가 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건 대게 시간이나 노력 혹은 다른 자원의 문제고 결국 뭔가가 된다해도 그뿐이다. 삶이 이야기를 통해 만들어준 개인적인 의미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짜 의미를 유행처럼 만들어 쫓고 있는 것 같다.
경험이나 소유도 같은 문제다.
인생은 있지도 않을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믿는 것을 엄격하게 고르고 그것을 관철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오늘의 내가,
원하는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태도라는 생각을 했다.
자진해서 한계지점에서 머무르자라는 생각 한 토막
부끄러움을 모르는 하루는 안전지대로 도망친 하루다. 그것이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을 살아내지 못한 하루에 부끄러운 마음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은.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많은 일들이 내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또한 없었다.
겸손이나 인내라는 것을 안전한 곳에서 떠올릴 때는 추상적이고 고요한 것이지만, 실제 곁에 둘 때는 격정적인 감정의 파고와 함께 하는 것이다. 겸손은 비통함이나 경외심 뒤에 오고 인내는 아픔과 함께 온다.
자신의 삶이 어려움없이 평화롭다면, 단지 겸손과 인내를 흉내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덕목은 늘 손아귀에 쥐고 있을만큼 가벼운 종류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알몸으로 수영하고 있는지는 파도가 빠져나가야 알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는 파도가 친 뒤에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일이지만 일신의 아늑함에 숨어들은 자신을 과대평가해서도 안된다.
현실은 계속해서 변하고 자기 자신도 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은 삶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자진해서 벌판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젊은 시절에는 너무 뜨겁게, 나이를 먹어서는 너무 차갑게 살아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이를 먹어서 자신이 세상을 잘 다룰 줄 알게 되었다고 혹은 지혜로워졌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는 편향된 생각이 아닐까 한다.
사람은 무언가를 얻으려는 것보다는 나쁜 감정을 회피하기 위해서 동기부여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이를 통해 생각해보면 젊은 날에 한계를 훌쩍 넘어 서 버티는 것은 되고자 하는 자신에 대한 열망 그리고 현실 속 자신과의 차이를 피하려는 두가지 마음의 혼재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둘 중 하나만 생각한다면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이가 들어 더 쉬운 길로 가려는 자신은 정말로 세상에 요령이 생기고 효과/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낸 것일수도 있지만 단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음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오랜 시간 혼란스러웠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돌이켜보면 너무 뜨겁기만 한 것도 답은 아니었다. 운동을 하면 너무 몰아붙여서 다치기 일쑤였고, 일을 할 때는 지나친 과로로 몸이 상해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그건 어떤 발바둥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 지금은 더 나아졌을까.
돈과 시간에 여유는 생겼지만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게 나 외의 세상에서 절대적인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은 아니니까. 적당히 하는 것들이 올바른 처신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가끔씩 뜨거운 마음이 생겨서 내 한계지점을 벗어났을 때는 벌거벗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한동안은 몸이 늙어도 사람의 마음은 쉽게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나이를 들어감에 따라 가장 주의해야 할 일은 마음이 늙는 것일지도 모른다.
충분히 만족한다고 해서 적당히 살지는 말아야겠다.
충만한 삶은 만족감을 불러왔을까. 사람의 마음은 결코 영원한 행복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더 많이 채우려 하기보다 자신의 영역을 넓혀서 기쁨의 종류와 빈도를 높이고 동시에 불편함을 감수해 만족의 역치를 낮추는 현실적인 결론을 따라야 한다.
물론 어린 시절에 했던 실수를 그대로 답습하고 싶지는 않다. 경험은 사람을 더 나아지게하는데 쓰여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계지점을 넘어서려고 맹목적으로 달려나가기보다는 나의 한계지점을 찾아서 그 경계선에서 머무르는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뜨겁고 차가운. 조금은 경험적이고 모호한 답이지만 모든 일에 통하는 원칙이란, 단지 모든 일들은 개별적이라는 것이다.
한계 지점에 서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지켜보고 다시 다음 한계선에서 넘을 듯 말 듯 위태롭게 서서 버티는 방법만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답은 항상 기본에 있고 진부하다. 경험이 중요한 것은 기본에 충실하도록 몸에 기억이라는 흉터를 새겨주기 때문이다. 타인의 경험을 통해 새긴 글귀는 쉽게 지워진다.
비참과 교만.
비교하지 말자.
비참해지거나 교만해기 때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이 말을 지키고 싶다.
간소하고도 정확한 말만 하고 싶다. 스스로가 진실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로 알 수 있는 것이란 실은 너무 적어서 종종 말수가 적어졌다.
가끔은 장황하게라도 닿아보고 싶어서 말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 모르는 수다쟁이 벙어리인지라, 이야기와 음악을 좋아한다.
종종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번역되지 않는 타자에 대한 구구절절한 세상의 표상이다.
이토록 난해한 글귀를 남기는 것 또한 벚꽃잎처럼 흐드러지는 하나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정의하여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이상 하나의 경험은 압축되고 각색되지 않은 총체적 사건으로 남는다.
쥘 수 없는 시간 그리고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갈증은 예술가들을 빚어내는 것 같다.
나는 예술가도 아니고, 단지 흘러가는 생각을 끊임없이 뱉어내는 영사기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 안에 꿈틀거리는 것이 뭔지 몰라서 양손을 집어넣어 마구 끄집어 내고 나면 잠시 조용해진다.
이건 단지, 이 순간 고요한 영원을 위한 의식이다.
한 발자국 물러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서는 위치가 달라지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의 발 밑은 선 자리에서 뒤로 물러서야만 볼 수가 있다.
재미있는 점은 우리가 멈춰서고, 물러서고, 그리고 고개 숙여 바라 볼 때에만 거기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치열하게 나아가는 사람은 멈춰서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은 멈춰서지 않는다.
아니. 멈춰서면 안된다. 100미터를 달려나가다 넘어지는 일은 있어도 멈춰 서는 일은 없다. 행복한 때를 맞이한 사람이 갑자기 멈춰 서 진중한 얼굴로 반성을 하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경주가 아니고 진실로 행복한 한 때가 아니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동시에 가질 수 없는 것 같다.
즐거움과 조신함을. 열정과 냉정을.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이상적인 완성에 못내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서글프면서 동시에 위로가 되는 일이다.
푸쉬킨은 말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말라.”
아마 수 년이 흐른 뒤에도 나는 여전히 나일 것이다.
그리고 단지 그것이 내가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다.
좀 더 나이먹고, 열심히 살았다면 조금은 더 세상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감정 조절에 서투르고 새로운 것들을 하는데 조심스러울 것이다.
생각이 많고 그럼에도 결국 해야 할 일을 하겠지.
기껏해야 그 정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운은 신의 것이고 인간성을 상실한 초인이 되고 싶지도 않다.
가늠할 수 없는 세상의 무게의 비해 존재의 무게는 견딜 수 없게 가벼운 것 같다.
사람들이 자신의 몸뚱이를 각자의 의미에 못 매달아 놓는 일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의미가 중요하다고 했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그런 것 없이도 사람은 살 아 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의미라는 것은 분에 넘치는 평화를 선물받은 현대인에게는 고르기 힘든 생일 선물 같은 것이다. 제대로 된 의미는 삶이 던져주는 것이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버릴 수 있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정의의 의미를 가진 사람들의 그것들은 그들의 원하는 바와 같이 삶을 지탱해주지 못한다.
결국은 우리 모두는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그냥 살 뿐이다.
하늘의 한 계단 아래에 앉은 왕이나 말석의 변변찮은 아무개나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천년 전에 세상을 호령하는 왕이었다고 해도 내 프라푸치노 한 잔 빼앗아 갈 수 없다. 단지 그게 삶에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보고 겪는 것이 많아지고 그 안에 들어가 이해하려고 발바둥치다보면 느는 것은 결국 궤변뿐임을 글을 적다가 알았다. 결국 나는 한 해를 먹을수록 더 어리숙하고 우유부단해지기만 하는구나. 그리고 언제나처럼 퇴고는 귀찮아서 못 한다.
오늘도 밤이 깊었다.
중요하다고 할만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메모에만 적어두면 그냥 묻히고 놓쳐버릴까봐 일단 포스팅해 봄.
오늘은 화롯불 같이 따스한 글을 보아 나도 예쁜 글을 적고 싶은 맘이 들었다.
할머니께서 커다란 밥공기에 밥을 함뿍 눌러 담아 주시듯 내가 느낀 온기를 가득 담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의 내게는 마땅한 재료가 없어서 어떤 얘기를 해야 될 지 모르겠다.
하루라는 재료와 글솜씨가 가난하여 그렇다.
봄날 풀 잎을 연주하는 바람과 사랑하는 이의 체온처럼 부드러운 강물을 표현하고 싶은데 그저 우물우물하다.
그래서 내 마음의 상자를 열어 보았으나 쟁여둔 것들이 몽땅 파스텔 뿐인 것을 알았다. 오늘은 그런 묘한 얘기보다는 원색에 가까운 생동감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노을보다는 작열하는 태양에 관하여.
백야가 아닌 눈부신 광야에 대하여.
가슴에 묻어 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어 터져나오는 일들에 관하여.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까닭없이 울적했다.
어떤 기쁨과 울적함이 섞이지 않고 함께 얼굴에 떠올랐으나 아무도 이런 감정을 일컽어 가르쳐 준 이 없으므로 나로서는 적절히 표현할 길이 없다.
잘 모르겠으니까 오늘은 그냥 고맙다고 말할게.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Reinhold Niebuhr
삶은 제 정상을 넘어 선 뒤에도
시시하도록 계속 이어지고
식은 맘은 과거의 거울을 통해 현명해지니
나는 종종 그립다.
스스로를 태우고 만데도 그 어린 맘이 그립다.
어릿한 것을 사랑하는 맘이 그러하니
어린 시절의 옷을 지어 입고 하늘이 무너지도록 태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