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사람이 쌓은 논리라는게 대게는 젠가를 하는 것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박식해보는 사람들의 의견 충돌 역시 누가 덜 틀렸느냐를 겨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나처럼 무식한 사람 눈에는 둘 중 하나가 완전히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결국 바보들끼리 싸우는 와중에 남들보다 타인의 흠을 좀 더 기민하게 찾아낼 줄 아는 예민함을 가진 사람은 그 특별함으로 밥맛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참으로 아쉬운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틀릴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주지하고 있다면, 모두에게 친절한 능력이 될 수 있을텐데 말이다.

그러니 기억하자. 겸양은 거만하고 기만적인 예의가 아니라 부족한 스스로에 대한 진실임을.

꿈이란 닿을 수 없어야 꿈이다.
혹은 계속해서 달릴 곳을 새로 마련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념없이 달리고 있는 상태. 그것이야 말로 진실된 꿈이다.
사람이란 만족을 모르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머리로 만족을 한다한들 꿈을 쫓을 때처럼 완벽한 상태에 있을 수는 없다.

칙센트 미하이가 말한 ‘몰입’만이 우리를 삶으로부터 완전히 도피시킬 수 있다.
‘열정’과 ‘긍정’이 혼합된 상태다. ‘불안’ 또한 섞일 수 있음이다.

나는 운이 좋아서, 목표한 것들을 꽤 이뤘다.
하지만 무언가를 얻음으로서 안식에 도달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달려온 속도로 어딘가에 처박히기 일쑤였다.

나는 내가 달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열등한 정신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날뛰는 마음을 잠재울 그릇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게 다 그렇다는 걸 알게됐다.

좋은 인생이란, 좋은 흐름으로 계속해서 달리는 것이다.

숨이 벅찬 것을 즐겨라.
세상이 잘 돌아갈 것이라는 쪽에 도박을 걸어라.
슬픔과 고통의 언덕은 오직 웃으면서만 넘을 수 있다.
종종 휴식을 취하되 멈추지 말아라.

믿음이란

주말에는 오랜 친구와 등산을 다녀왔다.

실제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활동이지만, 오랫만이었고 좋았다.
신변잡기와 은근한 농담이 흘러간 뒤에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하게되었다.

친구는 오래된 기독교 신자다.
얘기를 나누다 결국에는 하지 말아야 될 이야기. 즉, 믿음에 관한 주제를 스치게 되었다. 믿음이란 정치와 돈에 얽힌 이야기만큼이나 치명적-유혹적이고 위험한 주제 선정이다.

나는 그가 10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부수고 새로 짓는 과정을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았다.
그렇기에 그의 생각을 내 나름대로는 진심을 다해 존중하고자 한다. 또한 나는 (무신론자가 되어야 된다는 의견에 점차 설득되어가고 있는) 불가지론자로서 그를 베지않고 빗겨나가는 일에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신실한 그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말은 이미 예전에 꿰뚫은 구멍을 통해 지나갔기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몸에 입은 오래된 흉터를 상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내게 약속을 했다.
나는 그 약속이 지켜지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나처럼 독한 종류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약속이 진심임을 알았다.

그래서 조금 슬펐다.
이 세상에 흩어 뿌려진 진심을 담은 약속이 얼마나 많을까 잠시 잠깐 생각했다.

믿는 것이라는 건 뭘까하고 생각을 했다.
이유를 묻지 않고 진심을 다해 믿는 것일까.
아니면 끝까지 그 생각을 지켜내는 기개일까.
우문같다.

현답을 내리고 싶었다.
나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다만 정해진 일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후에 그것이 결국 잘못한 일로 밝혀지고 말지라도, 나는 그것을 잘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잘못된 일에 대하여 반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하루를 잘해내기만 하면 된다.

말과 생각은 우리 삶만큼이나 미묘해하고 변덕이 심해서,
나는 오직 행동만을 믿는다는 다짐을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모호하고, 잘하라는 말은 폭력적이다.

다만 스스로를 사랑하고, 이성을 믿음으로 삼는다면 결과는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재능과 노력이란 얽힌 가지는 비바람을 견디는 고목의 밑동과 같은 것이라,
인력으로 고난을 견디어 내는 시간을 더할 수는 있으되 빛에 도달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태풍에 꺽인데도 부끄럼없이 제 인생을 살았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삶에 운이 닿아 비 개인 맑은 날을 만난다면 그것은 퍽 감사한 것이지,
실은 개인이 꿈으로 삼을만한 일은 아니다.
마음이란 쉬이 차지 않는 달 같아서
모자라면 헛헛하고, 온전하여도 기울까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각 존재에게 주어진 박탈할 수 없는 자유란.
가장 인간적인 일.
타고난 동물성에 온전히 반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우리가 인간답다고 칭하는 일.

본성에 반한 고귀한 존재로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다.
옳은 것들을 고르고, 사랑을 지키고, 하루의 지난한 싸움에 패한 자신을 다시 믿는 것.
종국에는 자신이 믿는 인간으로서 죽는 것이다.

2018.10.26

나이가 들면서 바뀐 게 있다.

죽는 게 두렵지 않다.
누가 말했더라.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조심스레.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끝날 것이다.
다만 고통없이 우아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을 잃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두려운 일이다.
반대로 혹여라도 내가 가족들보다 먼저 죽게된다면 그 고통을 남기고 떠나는 것은 시리도록 미안한 일이다.

결국 삶은 사람에 얽히어 도망칠 수도 없고, 도망쳐서도 안되는 곳이 되어버렸다.
이렇듯 생이란 유예된 결말을 향하여 주어진 잠깐의 틈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몸은 쇠하지만 차갑게 식어버린 생각은 영원을 향해 달린다.
인간의 기억은 변함없이 흐려져갈테지만 순간은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영면할 것이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경주할 노력

남에게 충고하지 말라.

살다보면 스스로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렇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다.
즉, 세상에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확실하지 않은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정말 내 자신이 맞고, 상대는 틀린 정량적인 문제라고 해도 문제점을 지적하지 말자.
문제의 정답과 별개로 잘못을 수용하기 위한 감화력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심지어 수용성이 뛰어난 사람들조차도 상처를 받는다.
정말 잘못된 생각이라면 곧 스스로 깨닫거나, 머지않아 진실로 가까운 내부의 사람을 통해 고쳐질 것이다. 그리하여 고쳐지지 않는 사람이면, 내가 말해도 고칠 수 없던 것이다.

상대가 어떠한 문제에 관해 구체적이고 한정적인 내 의견을 물어볼 경우에는 오직 그에 한정해서 오직 나의 의견임을 명확하게 밝힌 후 얘기 해봄직하다.
그 이상의 내 가치관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향기가 풍기는 것과 같이 스며드는 것이지, 나는 이렇다라는 자기 주장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과 실제는 또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도 충고하지 말라.
글과 말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매우 부분적이다. 직접 접하지 못한 것은 경험이 아닌 지식으로 남을 뿐이다. 그래서 같은 말에도 우리는 무게감이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스스로 실패해 볼 기회를 박탈하는 폭력을 가해서는 안된다. 말과 타인의 경험으로 배운 것은 진짜가 아니라 언제든지 다시 잃을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실수를 박탈하여 성인이 되어 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작은 실수를 자주하고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다.

2018.08.22

간만의 뻘글.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를 여유롭게 빨다가 생각했는데.
노화는 꽤나 합리적인 전략이다.

물론 내 개인의 의지는 고려되지 않은 오로지 유전자의 영속성 관점에서 생각되는 일이지만. 아무튼 그렇다.

살다보면 다치기도 하고, 이런 일 저런 일을 겪으면서 신체가 최적의 상태를 유지할리없다.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성이 떨어지는 점이 가장 클 것이다. 성장기를 거치고 난 뒤 한동안의 환경에 최적의 신체를 유지하겠지만 그 뒤로는 변화하는 환경에 생물학적인 능동적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

그러니 주기적으로 새 틀로 갈아타는게 참 합리적인 전략인 셈이다.

그래도 나라는 자아가 보기에는 밥맛 떨어지는 결론이다.
더 고민해보면 자연은 의지와 개인의 자아에 별 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은 모양이다.
경험에 대해서도.
경험이 중요하다는 건 의외의 환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경험은 미래를 방해하기도 하니까. 더해서 고민해보면 자아라는 것도 인간의 제일 끔찍한 환상과 희망일 수 있겠다. 나야 Freeunwill은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사람이지만, 꼭 그렇다는 건 아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빅뱅을 상상한 천재들이나 가능하지, 난 내 두뇌로 내 차원을 뛰어넘는 상상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짜 낼 수 있는 옷은 이 세상에 주어진 옷감 그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바나나 우유를 다 마셨지만 조금 더 머리를 써보자면.
반대로 개인의 자아와 경험이 어떤 임계점을 넘어선다면 생물 스스로가 노화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인간의 역사가 보여주듯 노화가 먼저 정복될 것 같다. 사람들은 복잡계보다는 기계를 다루는데 능하고, 생물을 기계처럼 바라보는 것도 썩 잘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일 엄청난 태풍이 온다고 하는데 내 방은 덥다는거다.

2018.07.24

일상을 팽팽히 살아내던 와중에 잠깐의 틈을 내어주면,
오히려 나만의 생각에 깊이 빠져들고는 한다.

억누른 욕망이 튀어오르듯 깊고, 빠르게 생각의 숲으로 들어간다.
언어가. 두뇌가 달리는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스쳐갔는데, 논리가 따라 붙지 못했다고 여겨져서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듯 천천히 그 느낌의 궤적을 쫓아가야 할 때가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어떻게 설명하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소리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는 소리다.

믿음에 속지 않고 현실에 살겠다는 얘기다.
그 덕에 결코 단호해지거나 단단해질수는 없겠지만, 그 대신에 솔직함을 선택하겠다는 말이다.

나는 젊은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 솔직한 미숙함을 사랑한다.

지혜롭게 나이를 먹어가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자신을 잠시 밀어내고 다른 사람에게 내미는 손길을 사랑한다.

나는 단지 솔직하지도 않으면서 미숙하고, 남을 존중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변호할 줄 모르며.
조금 세상에 빗겨서서 그렇게 부끄럽게 세상을 관음하고 있다.

요즘은 이대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고삐없는 말을 타는 인생도 한번쯤은 괜찮지 않나싶다.

 

 

2018.07.06

요즘은 삶의 모든 것에 대한 의욕이 없어서, 이것 저것 그저 만지작 거리고 있던 차에, 예전에 깔아두었던 구글어스 프로와 스페이스 엔진에 손이 갔다.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는 세상의 광대함은 온 몸을 쭈뼛하게 만들었다.

“There are only two ways to live your life. One is as though nothing is a miracle. The other is as though everything is.” 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