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감상 예정이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대학로 선돌극장, 2016년 6월 08일 오후 8시.
치매 걸린 어머니와 세 딸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전 정보만 얻고 관극을 했다.
나 역시 치매를 앓으셨던 할머니와 수년간을 힘겹게 보낸 경험이 있기에 특별히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치매는 장치이고, 이 극은 상처에 관한 이야기이다.
상처가 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뿐만 아니라, 해소되지 못한 상처 위에 적당히 거죽을 덮고 또 다시 덮어서 종국에는 거기에 찬 고름이 스스로를 서서히 확장시켜나가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제 속내를 한꺼풀, 한꺼풀 벗겨 보여준다.
나는 처음 극이 시작하고 엄마와 세 딸이 처음 등장할 때, 제 정신이 아닌게 대체 누구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하나… 둘… 셋. 넷?’
그도 그럴 것이 세 딸들은 엄마 점순이에게 점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점”은 하나의 상징인데, 나는 이것이 상처와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나이를 들어가면서 스스로가 싫어했던 부모님의 모습을 닮아간다고 하지 않은가. 가족간에는 상처가 유전된다는 말처럼 해소되지 못한 고통은 흑사병과 같은 위험성이 있다.
그 시작은 어디일까?
아마도 극의 종반에 드러나는 점순이의 성폭행 피해 경험일 것이다. 그래도 점순이는 남편 명식을 만나 새로운 꿈을 꾸었다.
명식이 해외로 나간 틈에 중국집 주인 놈에게 범해지기 전까지는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일정보다 일찍 돌아온 명식에게는 뜻 모를 칠삭둥이 딸이 하나 생겼다. 그는 이 사실을 묻었다. 하지만 이 응어리진 아픔을 고대로 묻어두었다가 종종 파내어 다시끔 상기시키고는 했다.
그는 아내를 용서하지 않았고, 둘째 딸이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중국집에서 매번 서로에게 확인시키고는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용서하지 않은 채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점순이는 남편이 사라짐과 동시에 치매에 걸려 미치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세상에 상처 받았고, 발바둥치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고통의 해소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기에 미쳐버림으로서 도망치려고 했다.
TV에서 울려퍼지는 우주 다큐멘터리는 우주의 신비에 대해서 일갈한다.
빅뱅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암흑물질은 얼마나 빠르게 스스로를 팽창시키며 그 심연은 어디까지인지?
한 사람의 끝 모를 고통도 심연과 닮은 구석이 있기에 점순은 그 속으로 ‘훨~ 훨~’날아가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여기저기 다치고 찢긴 세 딸들은 엄마 점순이와 자신들에게 엮은 사슬을 끊어버림으로서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 고통의 줄을 영원히 끊어버리고야 만다.
그토록 원하는 것이었으니 점순이는 훨훨 날아갔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