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궁(神弓)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6월 23일 20:00

※ 본 글은 극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원로(ONE路) 연극제의 극 중 하나인 신궁(神弓)을 보았다.

평소와 같이 극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배제한 상태로 관람했는데.
극 초반에 흐름을 잘 따라가지 못했기에, 간만에 이런 행동을  후회했다.

극 시작과 함께 보여준 몇 개의 장면과 극의 본격적 배경이 되는 어촌(장선포)이 잘 연결되지 않았다. 몇몇 토속 방언들의 의미를 몰라 ‘어어…’ 하던 찰나에 장면이 지나갔고, 일부 대사도 제대로 듣지 못했던 게 화근이었다. 

극의 시작과 함께 보여준 장면은 주인공 왕년이의 과거를 보여주는 것 같은데, 다행히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살펴가는데 문제는 없었다.

그래도 이 부분이 맘에 걸렸던지라 후에 원작 소설인 천승세 작가의 <신궁1>을 찾아보려고 한다.

극은 어촌 무당 왕년이와 악덕 선주, 고리대금 업자를 중심으로 영세어민들의 비애를 다루고 있다. 왕년이를 통해 우리네 무속 문화를 엿보는 것은 보너스다.

왕년이의 남편 옥수는 어부다.
한번은 흉어2가 닥치는데 이 때 옥수는 선창 객수 판수에게 배를 넘기게 된다. 누군가의 시련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탐욕을 뽐낼 기회인 법이다.
그러고도 옥수의 빚은 계속 늘어 말미에는 판수의 배를 타고 일을 하러 바다로 나간다.

 

배가 돌아왔다.
해안으로 돌아온 배의 어창에는 왠일인지 대못질이 되어 굳게 닫혀있었다. 자꾸만 발칙하게 드는 상상을 휘휘 내저어내며 거부해보지만 그런 생각들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상상은 그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었고, 어창 속에는 많은 주검들이 있었다.

어민들의 절규를 듣는데 순간 소름이 끼쳤다.
그 순간 세월호의 기억이 떠올린 건 나 뿐이었을까?
과거에 쓰인 글에서 왜 나는 세월호를 겹쳐보게 되었을까. ‘세상은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일까?’라는 생각이 눈 앞에 펼쳐진 극과 나 사이를 순식간에 격리시키고 에워샀다.

왕년이는 죽은 자들을 위한 굿을 했다.
무속 신앙이나 신을 믿지 않는 나이지만 이 굿판이 누군가를 위한 진정성 있는 위로의 춤사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왕년이는 굿을 하지 않게 되었다.

세월은 무심하게도 수년 동안 흘러갔고, 왕년이는 어민들의 등쌀에 이기지 못한 탓인지 다시 한 번 굿판에 서게 된다.

모월 모일. 고리대금 업자가 태어난 그 날, 그곳에서 왕년이는 고리대금 업자가 쓴 바가지 위로 활시위를 당겨 목숨을 앗아가는 피와 복수의 굿판, 아니 스스로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굿판을 벌이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극은 현실과 달리 통쾌하기라도 하구나.
아아.

 


  1.  1979년 나온 중편소설로 창비사의 <20세기 한국소설> 22편 에 수록되어 있다. 
  2. 다른 때에 비해 물고기가 적게 잡힘. 

투더문(To the Moon)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 날 있잖아.

평소에 하던 일들은 다 하기가 싫은데 뭔가가 막 하고 싶은 날.
언제 구입했는지도 잘 기억이 안나는데, 이 게임이 내 스팀 계정에 들어있었다. 그 날 그걸 봤다.

게임은 이틀에 나눠서 했다. 그마저도 첫째날 게임이 오류가 나서 멈추지 않았다면 단번에 해버렸을 것 같다.

투 더 문(To the Moon)은 어렵지 않다. 기껏해야 맵을 돌아다니면서 아이템을 모으고 퍼즐을 몇 번 풀어주는 게 전부다.
소설 같은 게임이다.

하지만 음악과 이야기가 아름다워서 쯔꾸르 게임의 게임성조차도 특별한 매력으로 느껴지게 한다.

게임에 관해서는 딱히 할 이야기가 없다. 아이디어가 특별하다거나 여타 새로운 것들을 넣은 것은 아니니까.

중요한 것은 이야기이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잔뜩 첨가되어 있다.

생명이 위태로운 ‘조니’는 얼마남지 않는 시간동안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도움을 청한다. 도움을 주기 위해 나타난 사람들(플레이어)은 의뢰인의 기억으로 들어가 그것을 조작해 꿈을 이룬 삶을 살게해주는 일을 한다.

그의 꿈은 달에 가는 것이다.
왜 그게 꿈인지도 본인도 모르는데 아무튼 그게 꿈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조니의 삶을 하나씩 살펴나간다.

거기에는 아내 ‘리버’가 있다.
리버는 무슨 일 때문인지 미쳐버린 것 같은 행동을 보이는데, 오리 너구리 인형을 항상 가지고 다니며 종이 토끼를 병적으로 접어 조니에게 토끼에 대해 설명하게 한다. 자신의 머리를 자르기도 한다.

마지막에 우리는 John(조니)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도착하는데 거기에조차도 리버가 있다.
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의문점이 풀리게 된다.

어린 시절의 조니과 리버는 늦은 밤 숲 속에서 만났다.
둘은 서로의 이름에 대해 이야기하고, 밤하늘의 토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혹시라도 다시 만날 수 없게된다면 달에서 다시 만나기로 재차 약속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조니의 쌍둥이 형제였던 조이가 사고로 어머니의 손에 죽자 어머니는 그에게 약물을 과다 복용시켜 어린시절의 기억들을 모조리 지워버린다.

결국 기억은 소녀에게만 남게 되었다.
여기에서야 밝히지만 사실 리버는 아스버거증후군에 시달리던 환자이다.

시간이 흘러 조니와 리버는 학교에서 다시 만난다.
리버는 어린 시절에 조니에게 선물로 받은 오리 너구리 인형과 가방을 어딜가나 간직하고 다녔다. 그렇게 항상 조니의 주변 어딘가에. 나중에 둘이 영화관에 데이트를 하면서 밝혀지지만 리버는 대인관계에 문제를 갖고 있다. 그녀에게는 같은 공간에 존재하며 같은 것을 바라보는 자체로 그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기억도 없는 조니는 리버에게 끌리면서도 그 이유가 혼자 다니는 리버가 특별해 보이고, 자신도 그녀와 함께 해서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리버를 사랑하는 맘이 커진 조니는 그녀에게 처음 고백했던 불손한 자신의 맘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 고백의 원래 목적과 다르게 리버는 조니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다는 걸 깨달았고 그로 인해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리버는 어린 시절 조니가 선물로 줬던 가방을 등대를 향해 던져보라고 하며 그의 기억을 시험 해본다. 아무것도 모르는 조니가 그 가방을 정말 등대로 던져버리자 리버는 너무 놀라 달려가다가 절벽에 떨어질 뻔한다.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넘어갔던 그 장면을 돌이켜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놀라고, 가슴이 아팠을까.

그 때부터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조니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을 다한다.

밤하늘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토끼를 접어서 조니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그때처럼 토끼에 대해서 물어봤다. 조니가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하자 기억 속의 밤하늘에 떠있던 빛깔을 따라 토끼를 접었다. 물어보았다.
다시 또 접고 물어보았다.

어린 시절처럼 머리를 잘랐다.

리버는 병에 걸리게 되었다.
하지만 리버는 치료를 받기보다는 등대를 볼 수 있는 집을 짓기를 원했다. 등대는 별이기 때문이다. 서로 이야기하고 싶어하지만 닿지 못하기에 계속해서 인사를 보내는 별이다. 리버는 그런 등대를 지켜야만했다.
달은 그녀와 그를 이어주고, 그런 달까지 닿는 것이 등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오리 너구리 인형은 항상 함께였다.

리버가 세상을 떠났다.
조니는 리버가 그리웠고, 이유도 모른 채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달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의뢰를 했다.

잃어버린 기억으로 인해서 조니와 리버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둘의 사랑과 영혼은 달과 등대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에투알 갈라쇼(Gala des Étoiles)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16관, 2016년 6월 14일 19:00

라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에투알 갈라쇼(Gala des Étoiles)를 보았다.
에투알 갈라쇼는 MOOV Culture – Opera in Cinema 시리즈 중 하나로 상영 정보는 콘텐숍에서 확인가능하다. 처음에는 이름이 예뻐서 신사역의 브로드웨이로 가려고 했는데, 상영관이 작다는 얘기를 듣고 롯데월드몰로 갔다. 서울에서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월드타워, 홍대입구가 접근성이 좋은 것 같다.

Opera in Cinema

 

에투알 발레 갈라쇼는 2015 밀라노 세계 박람회 폐막을 축하하기 위한 공연이다.

감상 전에 간단히 갈라쇼 프로그램의 제목만 살펴보고 갔다.
초심자로서 새로운 것을 접할 때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느끼는 그 첫느낌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이다.

<카르멘>, <돈키호테>, <로미오와 줄리엣>, <스파르타쿠스>등의 대중적인 것들이 눈에 띄었다.

몸이 피곤한 하루였던지라 처음에는 잠이 올 것 같아서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병든 장미>를 보면서부터 서서히 집중이 되기 시작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왜 저렇게 빙글 빙글 도는 걸까?’ 라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그 모습에 어떤 객관적인 미가 있을지 찾고 있었다.
그런데 음악에 취한 탓인지, 아니면 배우들이 보여주는 기예에 가까운 몸놀림에 경탄을 했기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터 그 모습이 아름다워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부분이 아름답다고는 딱 잘라 말하지 못하겠다. 발레라는 장르를 보는 눈이 부족하기 때문에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아름답다 혹은 우아하다,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멋지다.’라는 생각을 했다.

특히 돈키호테의 이반 바실리예프(Ivan Vasiliev)는 마치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정말 순수하게 저런 몸놀림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경탄했다.
그외에는 <카르멘>의 연기와 <빈사의 백조>, <병든 장미>등이 맘에 들었다.

다음번에는 더 심도있는 감상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스스로에게 기대해본다.

참고로 이건 백스테이지 라이브 영상

에투알 갈라쇼 프로그램
<세개의 서곡 THREE PRELUDES> 루치아 라카라, 말론 디노
<마농 L’HISTOIRE DE MANON> 멜리사 해밀턴, 클라우디오 코비엘로
<병든 장미 LA ROSE MALADE> 마리아 아이히발트, 믹 제니
<그랑파 클래식 GRAND PAS CLASSIQUE> 알리나 소모바, 레오니드 사라파노프
<카르멘 CARMEN> 폴리나 세미오노바, 로베르토 볼레
<빈사의 백조 LA MORTE DEL CIGNO>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돈키호테 DON CHISCIOTTE> 이반 바실리에프, 니콜레타 만니
<이슬비 LIGHT RAIN> 말론 디노, 루치아 라카라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E GIULIETTA> 마시모 무루, 마리아 아이히발트
<스파르타쿠스 SPARTACUS> 마리아 비노그라도바, 이반 바실리에프
<프로토타입 PROTOTYPE> 로베르토 볼레
<해적 IL CORSARO> 레오니드 사라파노프,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시간의 춤 LA DANZA DELLE ORE>

동치미

2016년 6월 10일 오후 3시, 대학로 예그린씨어터.

아내를 따라 6일만에 세상을 버린 어느 시인의 실화를 담아냈다고 한다.

나로서는 그것이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노부부들은  한 분이 세상을 달리하면, 남으신 분께서도 쉬이 돌아가시는 것을 실제로 듣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별이라는게 세상의 순리인 줄 알면서도 작은 이별조차도 마음에 얼룩을 남기는 게 사람의 정이다. 하물며 한 평생을 함께 한 그(녀)의 잃은 고통은 얼마나 클 것이며, 세상의 살아가야 할 큰 이유가 저물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한번은 그런 적이 있다.
암으로 투병하시는 외할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맘이 쇠하여 몸까지 약해질까봐 비밀로 했기에 그때 당신께서는 암에 걸린 것을 모르셨는데

“내가 몸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아. 얼마 살 것 같지가 않아. 그런데 너이 할머니을 두고 어찌 죽냐. 어찌 죽어. 너희 할머니 나 없으면 안되는데.  나도 너 할머니 없으면 못 살고. 그래서 어떻게든 아파도 참고 참고 살아야 하는데.

우린 같은 날 죽어야 해”

이 소리를 듣고서 너무 가슴이 아파 소리를 내지 않고 채 눈물을 흘리는데, 당시에 합병증으로 외할아버지 눈이 잘 안보이시던게 그때만큼은 그리 고마울 수가 없더라.

실은 나도 비슷한 맘을 가지고 있었기에 놀라운 면도 있었다.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는 각자의 믿음과 선호라는 것이 있다지만, 그래도 진짜 사랑이라는 단어에는 설렘이나 욕망이라는 치기어린 가치가 아닌 믿음이나 숭고함이라는 더 격이 높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그래서 아무나 닿을 수 없고,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에서 한번 추구해 볼만한 가치라고.

아무튼 그렇게 공감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는지 정말 감동적으로 보았다. 사실 영화든 극이든 뮤지컬이던 콘텐츠를 계속 접하다 보면 연출이라는 부분이 저절로 눈에 익어서 마음으로만 ‘슬프다 슬프다’하고 마는 경우가 있는데, 정말이지 눈물이 나왔다.

정말 소중한 게 뭔지도 모르는 자식들이 미웠고, 자식을 위해서 자존심도 돈도 내어주는 아버지가 영민하지 못해 보여 미웠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고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가 최우선인 어머니가 미련해보여서 미웠다.

하지만 또 그 모습들이 주변의 현실들과 겹쳐보여 미워도 도무지 미워지지가 않았다.
두 노부부가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툴툴대는 얼굴 위로 드러나서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미운 맘과 사랑스러운 맘이 섞이어 그냥 슬펐다.

가족들에게 잘해야지.

  •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기에도 인생은 참 짧다’라는 얘기도 기억에 남는다.

엄마가 낳은 숙이 세 자매

※ 극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감상 예정이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대학로 선돌극장, 2016년 6월 08일 오후 8시.

치매 걸린 어머니와 세 딸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전 정보만 얻고 관극을 했다.
나 역시 치매를 앓으셨던 할머니와 수년간을 힘겹게 보낸 경험이 있기에 특별히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치매는 장치이고, 이 극은 상처에 관한 이야기이다.
상처가 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뿐만 아니라, 해소되지 못한 상처 위에 적당히 거죽을 덮고 또 다시 덮어서 종국에는 거기에 찬 고름이 스스로를 서서히 확장시켜나가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제 속내를 한꺼풀, 한꺼풀 벗겨 보여준다.
나는 처음 극이 시작하고 엄마와 세 딸이 처음 등장할 때, 제 정신이 아닌게 대체 누구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하나… 둘… 셋. 넷?’
그도 그럴 것이 세 딸들은 엄마 점순이에게 점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점”은 하나의 상징인데, 나는 이것이 상처와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나이를 들어가면서 스스로가 싫어했던 부모님의 모습을 닮아간다고 하지 않은가. 가족간에는 상처가 유전된다는 말처럼 해소되지 못한 고통은 흑사병과 같은 위험성이 있다.

그 시작은 어디일까?
아마도 극의 종반에 드러나는 점순이의 성폭행 피해 경험일 것이다. 그래도 점순이는 남편 명식을 만나 새로운 꿈을 꾸었다.
명식이 해외로 나간 틈에 중국집 주인 놈에게 범해지기 전까지는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일정보다 일찍 돌아온 명식에게는 뜻 모를 칠삭둥이 딸이 하나 생겼다. 그는 이 사실을 묻었다. 하지만 이 응어리진 아픔을 고대로 묻어두었다가 종종 파내어 다시끔 상기시키고는 했다.
그는 아내를 용서하지 않았고, 둘째 딸이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중국집에서 매번 서로에게 확인시키고는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용서하지 않은 채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점순이는 남편이 사라짐과 동시에 치매에 걸려 미치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세상에 상처 받았고, 발바둥치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고통의 해소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기에 미쳐버림으로서 도망치려고 했다.

TV에서 울려퍼지는 우주 다큐멘터리는 우주의 신비에 대해서 일갈한다.
빅뱅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암흑물질은 얼마나 빠르게 스스로를 팽창시키며 그 심연은 어디까지인지?
한 사람의 끝 모를 고통도 심연과 닮은 구석이 있기에 점순은 그 속으로 ‘훨~ 훨~’날아가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여기저기 다치고 찢긴 세 딸들은 엄마 점순이와 자신들에게 엮은 사슬을 끊어버림으로서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 고통의 줄을 영원히 끊어버리고야 만다.

그토록 원하는 것이었으니 점순이는 훨훨 날아갔을 것이라고 믿는다.

연극 둥지

2016.06.04 토요일 16:00, 압구정 윤당 아트홀

아빠랑 연극 <둥지>를 보고 왔다.
아빠랑 연극을 처음본다. 게다가 아빠는 연극을 처음본다.
영화는 종종 함께 보고는 하는데 취향에 맞지 않으시면, 중간부터 주무시는 일이 빈번해 연극은 어떨지 미리 좀 걱정이 되었다.

아무튼 제일 첫 줄에 앉아서 보았다.
둥지는 조부모와 손자의 이야기이다.
부모님들은 이미 선교 활동을 하러 해외로 나간지 오래고 그 빈자리를 손자가 채우고 있다.
하지만 손자에게 해외로 파견을 나갈 기회가 생긴다. 손자는 LA로 떠나길 원하고, 4분의 조부모님들은 그런 손자를 잡기 위해 며느리감을 구하는데…

나는 연극 주제가 조금은 무거울 줄 알았다. 이별이란게 그런거잖아요…
그런데 그건 오산이었다.
웃긴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웃긴다.
극이 무거워질라치면 또 웃긴다.

웃겨. 웃겨.
아빠도 영화보다 훨씬 낫다고, 좋다고 하셨다.
아빠한테 좋다는 최상급 표현이다.
평소에 “어떤 영화를 함께 볼까?”라고 물으면 “스릴러, 추리”를 좋아하신다고 하시면서 정작 본인 취향은 코메디가 아니셨던게 아닐까 생각된다.

테너 김병오의 토크콘서트

문화역서울 284 (구 서울역사)의 3등 대합실에서 진행하는 <테너 김병오의 토크콘서트>에 다녀왔다.

실은 얼마전 <복숭아 꽃이 피었습니다> 전시를 다녀오면서 문화역서울에서 종종 공연이 있음을 알게되었는데, ‘꼭 한번 가봐야지!’하고 마음을 먹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가보았다.

이전 공연들을 보니 선착순 200석과 같은 제한이 있어서 운이 나쁘면 헛걸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소소하게 객석이 준비되어 있었고, 관객들은 거기에 꼭 맞게 들어찼다.

아무래도 테너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벽이 전에 있던 무대들에 비해 대중에 가깝지 않은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아무튼 나로서는 그런 작고 깊은 성찬이 더욱 좋았다.

무대는 봄-여름-가을-겨울 이렇게 계절을 테마로 김병오씨께서 가곡과 가요를 섞어가며 불러주셨다.
사실 가곡만 해주셨어도 좋았을텐데, 의미와 그 곡의 감정을 몸이 스스로 알고있는 가요가 확실히 더 몰입해 듣기 좋았다.

나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전통 한국인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김병오씨의 표정 연기에 의외로 놀랐는데, 테너는 그저 목소리를 훌륭히 담아 노래하는 사람인줄만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곡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줄 알았다면 평소에 좀 더 우러러보았을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인연>이었다.
피천득씨의 인연 중 한 구절, 이선희씨의 인연을 한 곡 불러주셨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 얼마나 서정적인가.

판타스틱(FANTA STICK)

서대문역 부근에 위치한 NH아트홀에서 국악 뮤직쇼, 판타스틱(FANTA STICK)을 보았다.

평소에 국악에 대해 ‘나름의 매력은 있지만 조금 고리타분 한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것들을 꽤나 해소하게 되었다.

‘우리 악기가 이렇게 신나고 명쾌한 소리를 내다니!’
고리타분하다는 느낌은 우리 악기가 아니라 오래된 형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나 온 사방에 그 웅장함을 뽐내는 북과 공연 말미에 잠깐 본 난타의 두근거림에 흠뻑 반했다.
나는 타악기야 말로 진정 생동감 넘치는 악기라고, 그리고 북이나 드럼을 어디에서라도 배워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며칠 뒤에는 내 손에 스틱이 들려있을지도 모르겠다.

공연 자체는 코믹스럽고, 관객 참여를 유도하는 부분도 많아서 신나게 웃고 박수치면서 즐기다 온 것 같다.

크레센도 궁전 감상기

※ 극의 재미를 위해 스토리는 적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2016년 6월 1일 PM 08:00
CJ AZIT(아지트) 대학로에서 크레센도1 궁전을 보았다.

대학로는 몇번 가보았지만 CJ 아지트는 처음 가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CJ 아지트는 원래 광흥창에 하나 있었고, 올 4월에서야 대학로에 추가로 개관했기 때문이다.

나는 객석 1층에서 관람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무대가 가까워 조금 놀랐다. 무대는 포스터에서 본 분홍 빛을 띄고 있었는데, 중앙에 그네로 보이는 물체가 이목을 끌었다.

예쁜 색감, 그리고 궁전이라는 제목과 어울리는 오밀조밀한 무대와 달리 극은 마냥 예쁜 것만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야기는 어머니와 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버지와 남동생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완전히 실재하는 존재는 아니다. 아무튼 극은 우리가 가정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 일상적이고 익숙한 장면들이 극으로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묘한 우울함과 호기심이 일었다.
‘이런 식으로 완전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공통된 정서가 존재한다는 건. 실제 비슷한 고통을 받는 우리들이 얼마나 만연하다는 걸까’
극에서는 다양한 삶의 문제를 다룬다. 한 가정에 그런 것들을 모두 쑤셔담는게 가당치 않게, 그러나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먼저 찾아오는 것을 보니 불행이란 대게 한 대상만을 쫓아다니는 스토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독한 새끼.

정확하지는 않지만 극 중에 남동생이 이렇게 먹먹히 말했던 것 같다.
“나갈 수 없어. 우린 가족이니까.”
이 대사가 굉장히 무기력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이런 막막한 사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같이 슬퍼하는 것으로 족할까? 위로를 해야하나 아니면 더 나은 삶을 위한 질타를 해야하나. 위로는 값 싸고 상투적이며, 채찍은 세상이라는 놈의 아가리에 대항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기이다.

극이 끝나갈 때 남동생이 다시 말했다.
“너무 애쓰지 마. 그냥 살아있어.”

희망인 듯 아닌 듯. 나도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살아서 가끔씩 찾아오곤 하는 작은 기쁨을 맛 보는게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용기있고 현명한 일일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쨌든 살아있어야 행복이라는 걸 꿈꾸고 도전해볼 수도 있는 거니까.

 


  1. Crescendo : 점점 크게 

사진없는 2016 서울드럼페스티벌 감상기

어제 저녁(2016.05.28) 서울 시청광장으로 드럼 페스티벌을 보러 다녀왔다.

지난번 서울 시청을 들렸을 때 “문화예술프로그램” 팜플렛을 보고 캘린더에 저장해놓고 이 날을 손 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이번에 알았는데 서울문화포털을 방문하면 월별문화행사 pdf파일을 받을 수 있다.)

사실 난 드러머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 드럼도 배워보려는 계획도 맘이 꿈틀거리려던 찰나에 어깨를 다쳤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그래서 드럼도 잘 몰라.
아무튼 드럼 페스티벌은 어떨까 싶어서 계속 기대하고 있었다. 2016 서울 드럼 페스티벌은 금/토일 저녁(05.27~28) 양일간 진행되었는데, 맘 같아서는 이틀 내내 돗자리를 펴고 한량처럼 즐겨볼까 싶었지만 역시나 여러가지 일이 생겨서 어제 저녁에나 시간을 내어 볼 수 있었다.

나는 밤 8시부터 감상했기 때문에 이스턴모스트, Deantoni Parks, Alexis Von Kraven, Aric Improta, JOJO Mayer & Nerve, DJ 콘스탄틴 n Tweed의 연주를 볼 수 있었다.

한 줄 한 줄 감상을 남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스턴모스트는 오케스트라 느낌의 공연팀인데 동양적인 보컬(?) 스타일이 의외로 구성지고 중독성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현악기들의 울음소리도 참 멋드러졌다.
Deantoni Parks는 표정도 그렇고, 음악도 마찬가지로 자기만의 개성과 세계가 명확한 것 같았다. 박자가 오묘하다는 느낌.
Alexis Von Kraven은 해골 마스크를 쓰고 온 근육질의 드러머였는데, 마스크 때문인지 친구 녀석 중 하나가 입이 마르게 추천해 온 애니메이션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가 연상되었다.
Aric Improta는 좋았다. 정말 좋았다. 이런 정숙한 단어로는 감정을 충실히 표현하지 못하는 느낌이다. ‘존나’ 좋았다. 빠르고, 신난다. 게다가 덤블링도 취미로 즐기는 열혈 드러머 같았다. 드럼외에는 신경쓰기 싫다는 듯 두른 머리띠나 런닝 한 장의 패션조차도 맘에 든다.
JOJO Mayer는 내가 원래부터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신 분이다. 외모 역시 드럼 외길 인생을 달려오신 분 같은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마지막 무대는 DJ 콘스탄틴 n Tweed의 무대였다. 이 팀은 DJ와 드러머 이렇게 두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말 신이 났다. 특히 나는 전광판 바로 앞이라 DJ 단독 샷을 보고 있었는데 느낌이 충만하셨다. 미쳐 날뛰기에 충분한 음악을 선사해줬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공연이 열린 곳의 특성상 어르신들도 많으셨고, 다들 조심스럽게 즐기는터라 혼자 광란의 밤을 보내고 남의 휴대폰에 담겨 인터넷으로 올라온 나의 모습을 감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확실히 음악은 라이브로 즐겨야 하는 것 같다. 특히 이번 공연은 음악이 내 몸을 때리는게 느껴질 정도의 위치에서 감상했는데, 드럼 소리가 심장에서 번져나오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켜 묘한 떨림과 흥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