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FANTA STICK)

서대문역 부근에 위치한 NH아트홀에서 국악 뮤직쇼, 판타스틱(FANTA STICK)을 보았다.

평소에 국악에 대해 ‘나름의 매력은 있지만 조금 고리타분 한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것들을 꽤나 해소하게 되었다.

‘우리 악기가 이렇게 신나고 명쾌한 소리를 내다니!’
고리타분하다는 느낌은 우리 악기가 아니라 오래된 형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나 온 사방에 그 웅장함을 뽐내는 북과 공연 말미에 잠깐 본 난타의 두근거림에 흠뻑 반했다.
나는 타악기야 말로 진정 생동감 넘치는 악기라고, 그리고 북이나 드럼을 어디에서라도 배워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며칠 뒤에는 내 손에 스틱이 들려있을지도 모르겠다.

공연 자체는 코믹스럽고, 관객 참여를 유도하는 부분도 많아서 신나게 웃고 박수치면서 즐기다 온 것 같다.

크레센도 궁전 감상기

※ 극의 재미를 위해 스토리는 적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2016년 6월 1일 PM 08:00
CJ AZIT(아지트) 대학로에서 크레센도1 궁전을 보았다.

대학로는 몇번 가보았지만 CJ 아지트는 처음 가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CJ 아지트는 원래 광흥창에 하나 있었고, 올 4월에서야 대학로에 추가로 개관했기 때문이다.

나는 객석 1층에서 관람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무대가 가까워 조금 놀랐다. 무대는 포스터에서 본 분홍 빛을 띄고 있었는데, 중앙에 그네로 보이는 물체가 이목을 끌었다.

예쁜 색감, 그리고 궁전이라는 제목과 어울리는 오밀조밀한 무대와 달리 극은 마냥 예쁜 것만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야기는 어머니와 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버지와 남동생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완전히 실재하는 존재는 아니다. 아무튼 극은 우리가 가정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 일상적이고 익숙한 장면들이 극으로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묘한 우울함과 호기심이 일었다.
‘이런 식으로 완전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공통된 정서가 존재한다는 건. 실제 비슷한 고통을 받는 우리들이 얼마나 만연하다는 걸까’
극에서는 다양한 삶의 문제를 다룬다. 한 가정에 그런 것들을 모두 쑤셔담는게 가당치 않게, 그러나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먼저 찾아오는 것을 보니 불행이란 대게 한 대상만을 쫓아다니는 스토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독한 새끼.

정확하지는 않지만 극 중에 남동생이 이렇게 먹먹히 말했던 것 같다.
“나갈 수 없어. 우린 가족이니까.”
이 대사가 굉장히 무기력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이런 막막한 사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같이 슬퍼하는 것으로 족할까? 위로를 해야하나 아니면 더 나은 삶을 위한 질타를 해야하나. 위로는 값 싸고 상투적이며, 채찍은 세상이라는 놈의 아가리에 대항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기이다.

극이 끝나갈 때 남동생이 다시 말했다.
“너무 애쓰지 마. 그냥 살아있어.”

희망인 듯 아닌 듯. 나도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살아서 가끔씩 찾아오곤 하는 작은 기쁨을 맛 보는게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용기있고 현명한 일일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쨌든 살아있어야 행복이라는 걸 꿈꾸고 도전해볼 수도 있는 거니까.

 


  1. Crescendo : 점점 크게 

사진없는 2016 서울드럼페스티벌 감상기

어제 저녁(2016.05.28) 서울 시청광장으로 드럼 페스티벌을 보러 다녀왔다.

지난번 서울 시청을 들렸을 때 “문화예술프로그램” 팜플렛을 보고 캘린더에 저장해놓고 이 날을 손 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이번에 알았는데 서울문화포털을 방문하면 월별문화행사 pdf파일을 받을 수 있다.)

사실 난 드러머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 드럼도 배워보려는 계획도 맘이 꿈틀거리려던 찰나에 어깨를 다쳤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그래서 드럼도 잘 몰라.
아무튼 드럼 페스티벌은 어떨까 싶어서 계속 기대하고 있었다. 2016 서울 드럼 페스티벌은 금/토일 저녁(05.27~28) 양일간 진행되었는데, 맘 같아서는 이틀 내내 돗자리를 펴고 한량처럼 즐겨볼까 싶었지만 역시나 여러가지 일이 생겨서 어제 저녁에나 시간을 내어 볼 수 있었다.

나는 밤 8시부터 감상했기 때문에 이스턴모스트, Deantoni Parks, Alexis Von Kraven, Aric Improta, JOJO Mayer & Nerve, DJ 콘스탄틴 n Tweed의 연주를 볼 수 있었다.

한 줄 한 줄 감상을 남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스턴모스트는 오케스트라 느낌의 공연팀인데 동양적인 보컬(?) 스타일이 의외로 구성지고 중독성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현악기들의 울음소리도 참 멋드러졌다.
Deantoni Parks는 표정도 그렇고, 음악도 마찬가지로 자기만의 개성과 세계가 명확한 것 같았다. 박자가 오묘하다는 느낌.
Alexis Von Kraven은 해골 마스크를 쓰고 온 근육질의 드러머였는데, 마스크 때문인지 친구 녀석 중 하나가 입이 마르게 추천해 온 애니메이션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가 연상되었다.
Aric Improta는 좋았다. 정말 좋았다. 이런 정숙한 단어로는 감정을 충실히 표현하지 못하는 느낌이다. ‘존나’ 좋았다. 빠르고, 신난다. 게다가 덤블링도 취미로 즐기는 열혈 드러머 같았다. 드럼외에는 신경쓰기 싫다는 듯 두른 머리띠나 런닝 한 장의 패션조차도 맘에 든다.
JOJO Mayer는 내가 원래부터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신 분이다. 외모 역시 드럼 외길 인생을 달려오신 분 같은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마지막 무대는 DJ 콘스탄틴 n Tweed의 무대였다. 이 팀은 DJ와 드러머 이렇게 두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말 신이 났다. 특히 나는 전광판 바로 앞이라 DJ 단독 샷을 보고 있었는데 느낌이 충만하셨다. 미쳐 날뛰기에 충분한 음악을 선사해줬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공연이 열린 곳의 특성상 어르신들도 많으셨고, 다들 조심스럽게 즐기는터라 혼자 광란의 밤을 보내고 남의 휴대폰에 담겨 인터넷으로 올라온 나의 모습을 감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확실히 음악은 라이브로 즐겨야 하는 것 같다. 특히 이번 공연은 음악이 내 몸을 때리는게 느껴질 정도의 위치에서 감상했는데, 드럼 소리가 심장에서 번져나오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켜 묘한 떨림과 흥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 공포 요약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제101차 오픈 포럼 “보이지 않는 미세먼저 공포” 동영상입니다.
1시간 40여분에 달하는 동영상이지만 실생활과 밀접하게 알아 둘 내용이라고 생각되어 동영상을 보고 정리해보았습니다.

  • 간단 요약
    1. 작은 먼지를 추적해 본 결과 폐와 뇌, 방광에 존재한다. 즉, 세포벽을 통과한다고 설명 가능.
    WHO IARC에서 실외 대기 오염을 발암등급 1로 지정.2. 현재 한국의 미세먼지 측정은 오차로 인해 부정확하다. 현재 도로변(그런데 도로쪽의 건물 안)과 생활공간 이렇게 2곳에서 측정. 실제 우리 체감보다 훨씬 낮게 측정된다. 60% 정도의 정확도로 보면 맞다.

    3. 먼지가 만병의 근원 중 하나이다.

 

  • 그러면 각 개인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1. 도로 인접 생활 및 운전을 가능한 피할 것.
    현실적인 실천 방안을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때 거주지를 도로에서 떨어진 곳에 정할 것, 차량이 적은 국도에서 운전 중에 차량 환기를 시켜줄 것, 도로로 부터 떨어져서 걷을 것 등

    2. 조리시 발생하는 미세먼지가 매우 심하다. 생선구이, 삼겹살 구이, 계란 후라이등 조리시 발생.
    레인지 후드를 반드시 관리(2년마다 점검)&사용하고, 조리시 반드시 창문을 연다.

    3. 청소기 사용시 미세먼지 발생.
    즉, 청소기 미세먼지 방출량 등급을 의무적으로 표시하도록 되어 있으니 꼭 확인하고 구입. 또한 청소기를 돌리며 환기를 시킬 것. 물걸레질을해서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것.

 

  • 황사 인증 마스크를 구비해 놓을 것, 공기청정기의 효과와 유지비용을 알아보고 적용할 것.

무제

인생은 짧다.
그건 수백일에 그칠 수도 있고, 수십년이 될수도 있으나 각 개인들이 원하는 모든 것들을 성취하기에 짧다는 건 부정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인생 무상이다.
우리는 태어남을 선택하지 않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자유는 있으나, 삶은 고행이다라는 명제가 띤 세상에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이 곳에 소중한 뭔가 남아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허나 이것은 살기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죽지 않기로 결정한 소극적 생존에 더 가깝다. 삶의 의미에 대한 결정을 유예하고 고통과 기쁨의 크기를 조심스럽게 가늠해본다. 순간의 기쁨을 고통의 마취약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살기를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숨을 쉰 체 죽어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살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이유를 던져주지 않은 세상에 자기만의 이유를 달아야 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몇 가지 작은 이익을 위해서 마음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함부로 판단해보자면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대게 그런 것 같다. 어린 시절동안 몇 개 가치의 무게를 양손에 가늠해보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언제든 떨어지지 않는 행동이 될 정도로 완전히 내 것이 되지는 못한 생각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 사랑하는 것. 이 두가지는 목숨을 팔아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다.

그 두가지를 침해하지 않는 경우 나는 즐거움을 최우선 가치로 둔다. 더 크고 행복하게 살기위해서 포기해야 될 것들은 가식, 타인의 시선, 무의미한 사회의 관습 따위다.

바보같지만 왠지 이런 생각을 똑 부러지게 적어놔야할 것 같아서 여기 적어둔다.

The Egg (by Andy Weir) 구자형씨 텔링

 

아래에는 스포일러를 담은 개인적 감상이 포함되어 있으니 스크롤을 조심해서 내려주세요.

 

 

 

 

고요한 떨림이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단지 흥미로운 단편 소설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구자형씨의 멋진 목소리와 좋은 음악이 곁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듣고 잠시동안 멈춰진 시간과 닫힌 공간에 갇혀버린 기분이 들었다. 단 한숨의 공기조차 멈춰버린 듯하다.

트루먼 쇼의 트루먼처럼 우리 모두는 이 우주에서 유일한 주인공이었으며, 동시에 모든 가해자이며 그 가해자에게 학대당한 피해자였다. 내가 사랑하는 이는 나 스스로였으며, 내가 미워하는 사람 역시 나였다.
네이버 웹툰 ‘죽음에 관하여’에서 비슷한 감성을 느껴본 적이 있다. (현재 2화를 볼 수 있는데 관련해서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유료로 바뀌어 몇 화인지 확인해볼 수가 없다.)

만약 세상이 이 이야기와 같다면… 지난 생에서 나쁜 짓은 이미 다 해버리고 지금 충분히 성장한 영혼이기를 빌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으로의 삶이 아직 남아있으면 좋겠다.

못난이 큐브

내 기억이 맞다면 이 녀석은 나와 20년 이상 함께 해 온 녀석이다.
확실히 초등학교 저학년 때도 내 손에 쥐어져 있었으니, 참으로 투박하고 튼튼하다고 할 수 있겠다.

설계 자체가 조악한 탓인지 요즘 나오는 큐브처럼 돌리는 맛이 좋지 못하다. 철컹 철컹 걸리는 맛이 마치 육중한 쇠붙이의 몸놀림같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가지고 놀려면 손아귀에 힘을 잔뜩 주어야 하는데 어린 시절 어느 날은 하루 종일 가지고 요리 조리 돌렸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는 한 면을 맞추기도 어려웠는데, 3~4학년 쯤에는 의외로 끈기가 생겨 3면까지는 거뜬히 맞추고 종종 4개면을 맞추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다 맞추지는 못하고 포기했었다. 그러던 것이 군대에서 선임이 큐브를 가지고 노는 통에 공식을 배워 그제서야 처음으로 여섯 면의 색을 완전히 맞춰보았다.

한번은 때가 잔뜩 끼어서 힘으로 각 블럭을 빼낸 후 세탁하기도 했었다. 찌글 찌글 못생기고 잘 돌아가지도 않는 이 녀석을 오랫만에 꺼내 맞춰보니 시간도 잘가고 역시 나는 이런 것들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큐브도 틈 날 때마다 하면 집중력이나 두뇌 개발에 참 좋을 것 같은데… 뭐, 다른 활동도 그런 면들이 없지 않아 있으니 지금은 집중하는 것에 집중하고 나를 비워내기 위해서 이 아이를 놓아주기로 했다.
안녕!

에버튼

Everton
푸르딩딩 녹색 코끼리. 녹끼리, 에버튼

에버튼. 이 놈은 내 생애 첫 해외 여행을 기념해주는 녀석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깐짜나부리 – 콰이강의 다리 앞 기념품점에서 스스로의 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구입했다. 그즈음 나는 한 친구에게 물건에 이름을 붙이는 법을 배웠는데, 이 녀석이 녹색 코끼리라는 점에서 내가 즐겨 사용하는 에버노트를 연상시켰기에 이를 사람 이름처럼 바꾸어 에버튼이라고 불렀다.

녀석은 그로부터 1년 반이 넘도록 내 책상 위에서 동거동락했다.
하지만 이제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초심자의 입장에서 녀석을 놓아주려고 한다.
굿바이. กล่าวล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