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15

오늘은 어릴 적 살던 동네에 다녀왔다.

언젠가부터 계획없이 발길 닿는대로 가다보면 가끔 그곳에 도착한다.
그 동네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대로인 점이 많다.
동네 구멍 가게는 편의점이 됐고 만화책방은 빌라가 되었지만, 집 앞 세탁소와 역 앞의 과일 가게는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처럼 익숙하게 내가 살던 골목으로 돌아 들어서면 마법이 걸린 것처럼 순식간에 과거가 열린다.
엄마한테 천원짜리 지폐 한장을 받아 매일같이 누나랑 떡볶이를 사서 돌아오던 그 골목. 나보다 두어살 많던 동네 형들과 축구를 하다가 울고는 하던 작아져버린 골목.
떡볶이가 아직 익지 않아 기다릴 때면 나는 그 앞의 오락실에서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아이들이 게임하는 것을 물끄러미 구경하고는 했다.

“왜”
‘이 작은 골목에서 딱 두 개만 바뀌었는데 그게 내가 살던 집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종일을 함께 하던 가장 친했던 친구 녀석의 집일까’
라는 생각을 하고 턱을 들고 입을 삐죽거리며 시멘트로 막혀버린 옛 친구의 집 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없어져 버린 문 앞에는 원래 높은 계단이 있었고 나는 늘 그 높고 좁은 계단에서 떨어지지는 않을까 긴장을 했었다. 어린 그 날처럼 침이 꼴깍넘어갔다.

이 조그만 골목에 낯선 사람이 사연 많은 얼굴로 겨울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모습이 과거의 망령으로 오해를 받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칠 때쯤 고개를 돌리니 작은 CCTV 하나가 눈에 띄었다.
대문 사이로 들어간 공을 줍겠다고 문을 두드리니 고함을 쳐내던 그 이웃분이 아직도 그 집에 살고 계신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과거로부터 돌아 나오려는 찰나 한 할머니께서 작은 폐지를 한 손에 쥐고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순간 내가 살던 집의 2층에 살던 주인집 할머니가 겹쳐 지나갔다.
‘아, 아니겠지’
족히 30년 전의 일이라 살아계신다면 100세도 훌쩍 넘으신 분이 이렇게 정정하실리가 없지.

오늘은 과거에 너무 취한 것 같아 취한 김에 유치원에 오고 가던 길, 학교 통학길도 걸어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는 이제 우리집을 가진다며 부푼 맘으로 부모님과 모델하우스를 보러 걸어다니던 길을 통해 걸어왔는데 그때의 엄마는 20대였더라. 우리 엄마 참 젋고 예뻤는데.
엄마는 내게 처음부터 엄마라 항상 모든 것을 의지했는데.
그 나이에 힘든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을 더 잘 살아내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걸 알지만, 하루 정도는 잠깐 과거에 들러 쉬다가 가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되지 않을까.

에버노트 무료 사용자 혜택 대폭 축소

에버노트 무료 사용자 혜택이 대폭 축소되어 1개의 노트북과 50개의 노트만을 제공하게 되었다. 사실상 무료 사용 계정은 맛보기용으로 격하된 것인데 회사가 잘 되서 유료화에 박차를 가한 것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 고육지책으로 짜낸 듯 보인다. 흡사 곧 망할 회사가 조금이라도 법인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마지막 희망퇴직자를 받는 것 같다고 할까.

에버노트를 10년 넘게 사용해온 입장에서는 좀 서글픈 마음이 든다. 요즘은 구독 경제라 구독 요금으로 이것저것 내는 입장에서 구독을 하나 추가하는 게 싫다기보다, 내가 사랑했던 이 앱을 구독 할 까닭이 없다는 사실이 좀 씁쓸하다.

에버노트는 이제 다른 노트 앱에 비해서 장점이랄 것도 없는 죽어가는 유니콘이 되었다.
일단은 obsidian과 원노트로 대부분 노트를 옮길 것 같다.

이런 걸 볼 때마다 혁신(革新)이라는 단어에 침착하게 되는데, 현재를 지켜내면서 새로운 것으로 변모를 할 수 있는 능력이야 말로 정말 대단한 것 같다는 생각에 빠진다.
지켜내는 것보다는 새롭게 만드는 편이 훨씬 쉽다. 그만큼 한 손에 현재의 영광을 쥐고서 시도하는 변화가 어렵다는 것이고, 롱런하는 사람들의 힘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

요네즈 켄시 – Lemon

언젠가부터 자주 듣다보니 의미도 모른 채 가사를 외워버린 노래.

노래를 만들던 중 요네즈 켄시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노래의 첫 구절부터 이 사람이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할 수 밖에 없다는 건 그 사람이 사용하던 물건이라도 내게 말을 걸어줬으면 좋겠고, 묘하게 남은 향이 날아가는 것이 너무 싫어서 하루가 완전히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맘이니까.

아무튼 태어나 버린 이상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는 떠나가야 하기에 이별은 아무래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 참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애를 써서 의미가 있다고 이름표를 붙여놓은 것들은 돌이켜보면 대게 부질없고, 그저 기쁘고 슬퍼하고 화나고 즐거운 일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일들이 오직 삶 그 자체고 우리가 살았음을 밝히고 있으니.
그걸 알면서도 매일 매일 하루하루에 파묻혀 잊고 마는 것이 참 인간적이다 싶고 우습다.
그러다 가끔 다시 찾아오는 선명한 하루는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알려주는 것 같다. 어쨌든 어떻게든 하루를 살고 있구나. 이건 오늘이고 오고 있는 건 내일이고. 내가 없을 내일까지 여기 그대로 있겠구나.

230123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고민을 너무 오랫동안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많은 종류의 고민들은 이미 물어보았고 답을 내렸기에, 비록 만족스럽지 못한 답이라도 그저 묵묵히 믿는대로 따르면 그 뿐입니다.

최근에 많이 하는 생각은 모든 것을 기적으로 바라보는 가치관입니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자연스럽다고 표현합니다. 자연이 그대로 있었고, 우리는 그에 익숙해졌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우연히 그 모든 것에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만약 내가 물이 필요하지 않는 생명체라면, 물이 필요한 존재를 보면서 얼마나 기이한 맘을 품을까.
왜 우리는 다른 생명을 섭취하는 괴상한 의식을 통해 하루를 연장하는 구조를 갖게되었을까. 왜 세계가 이렇게 독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음에도, 어떻게 우리는 그것들을 당연하게 받아 들일 수 있는 황당무계한 사고를 부여받았을까.

이런 생각이 한번 뿌리를 내리면 세상의 모든 것이 기이하고 놀라워집니다.
그 모든 우연. 제 머리로는 셈할수도 없이 끝없이 펼쳐진 가능성 위에 놓인 한 점의 현실.

하나의 삶이 소유한 작은 시공간에서 가장 멋진 점은 우리가 자유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쫓는게 무엇이건. -믿는 것, 부여된 혹은 만든 의미나 이야기 –
심지어 자유라는 건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포기하는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말도 안되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을 빌려쓰고 있다는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은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제일 먼 곳까지 날아갑니다.
어쩌면 불가능했을 그 모든 것이 있었고, 있을테니까요.

내일이 되면 또 다시 인간적인 문제들이 삶을 가로막고, 오늘을 위한 문제들로 눈을 가릴 것을 압니다.
해가 뜨면 해야 할 일을 해야하고, 미래를 오늘로 가져오기 위해서 사람이 만든 규칙안에 내 몸과 마음을 끼워 맞출 것을 압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라는 한 점이 여전히 말도 안되는 기적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마음만은 어디에도 쫓기지 않고 내가 원하는 나로 존재 할 수 있습니다.

삶은 기적이라는 말로 남을 위로하거나 설득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좋지 않은 점은 사는 것보다 죽는게 합리적일수도 있는 현실을 만나서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삶이 개인에게 허락한 것은 그런 곤경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도움을 주고, 그런 불운을 만난 자신을 세상이 돕도록 청하는 것뿐입니다. 그런 현실적인 한계 속에서 누군가는 타인보다 더 가혹한 세상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제가 여전히 불가지론자로 남아 세상을 쏘아보는 이유입니다.

낙관주의자가 저를 설득할 수 없듯, 우리도 세상이 모든 면에서 평평해지도록 설득할 수 없습니다. 차면 기울고, 기울고 나면 다시 차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기이하게도 말이죠.

그럼에도 저는 또 생각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놀랍고 이해할 수 없다고요.
이 자연스러운 생각은 그 어떤 모순에도 불구하고 저를 인간적인 문제들로부터 떼어내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이는 자연의 경이에 비하면 인간이 만든 퍼즐이 너무도 작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세상의 경이를 보고 있으면, 누군가의 마음이 당신을 해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자기 자신일지라도요.

221003

불편함에 대한 예민함, 편안함에 대한 무뎌짐, 망각 이 세가지 때문에 인간은 우리가 행복이라고 상상하는 것에 영영 도달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먼저 살았던 생각이 깊은 사람들이 단지 마음의 평화가 행복이라고 주장한 까닭이 이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이 짜증스러웠고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그 평화라는 것이 생각보다 더욱 더 도달하기 힘든 것인 것에 반해 보상이 너무 적은 것처럼 여겨졌다.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을 만들어 이런 세상에 가둬둔 것들은 얼마나 심보가 고약한 놈들인가 생각을 하다가
반대로 결국 이런 모순에 갇힐 정도로 미묘하게 모순적인 존재들만 지금 이 세상에 살아남은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똑똑하거나, 더 미련하거나, 더 감정적이거나, 더 아둔하거나 이런식으로 조금이라도 더하거나 덜한 존재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것 같다.

그럼에도 남겨진 유일한 것은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인 것 같다.
자유가 실존하던 그렇지 않던 우리는 그렇다고 믿을 수 있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를 행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원시적은 사회에서는 힘이 그것의 기반이었고, 사회에서는 결속력이 미약해 듬성듬성한 울타리 같은 룰이 그것을 대신한다.
이성이라는 것이 주어졌으므로 다른 존재의 자유 역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보면 자연은 무질서한 엔트로피로 향해가고, 이성은 정리하려는 강박을 가진 인간의 감옥인 것 같다.
그럼에도 나라는 질서를 가진 하나의 개인 존재는 그것을 감내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질서를 부여하려는 마음이 인간의 숙명인 것 같다.

세상 속에서 계속 삶을 따라가는 것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유연하려고 하고 나와 같이 이런 불합리한 여행을 하고 있는 다른 존재들의 마음을 어렴풋하게 상상해가면서 그냥 살아가는 것 뿐이다.
다만 마음은 거창한 무엇을 향하는 게 아니라 눈 앞의 이야기와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는 걸 잊을 때마다 상기할 수 있어야겠다.

220912

살다보면 그 어떤 말이나 생각으로도 닿을 수 없는 곳에
갑자기 놓여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며칠 전 그런 순간을 만났다.
수족관 속 눈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찰나에 내 존재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몸을 돌리자 따라오는 고개와 눈동자에 유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 치도 안되는 유리 하나 사이에 놓인 너무도 다른 두 존재가 기이하게 느껴졌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이상 세상에 더 놀랄 일이 있을까.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밝히고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들은 주어진 낡은 기적에 익숙해져서 새로운 장난감을 찾아 해메는 어린애가 아닐까.

한번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이상해보인다.
사람이란 어떻게 이토록 기이한 세상에 자연스럽다는 표현을 그토록 태연하게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무뎌질 수 있을까.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것처럼, 혹은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살아가는 두가지 방법만이 있다고 했다.

곱씹어볼수록 아는 것이 아니라 뭘 모르는지만 점점 더 선명해진다.
그리고 영영 모를 수 밖에 없을 것들이 많아진다.

존재를 이루는 그 성긴 힘이 견디어 낼 때까지 우리는 오직 흩어지는 법 밖에 모르는 세상에 맞설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시인들의 자리가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모든 것이 비극인 것처럼, 혹은 모든 것이 축복인 것처럼 살아가는 두가지 방법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220817

사람들은 가끔 세상을 많이 보거나 이런 저런 경험을 통해, 혹은 지식을 통해 그렇지 못한 다른 이들과의 우열을 가르려고 시도한다.
일면 이해가 되지만 유한한 인간에게 앎이란 일생에 채우지 못할 못이고, 어렵사리 도달한 깨달음이란 실은 뒷걸음질에 닿기도 하는 티끌같은 관점의 차이다.

우리가 바보같은 건 어쩌면 어른이 되기에는 너무 짧은 생에 어른이 되기를 강요받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남과 자신을 구분하려고 하는 강박은 우리들이 생각이라는 개개인의 맞춤 감옥에 갇혀있기 때문에 생긴 신경증이라는 상상을 한다.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는 이 흥미로운 언어 퍼즐은 실은 진실의 근사값에 불과하기에 늘 모호한 경계를 자유로이 타고 넘는다. 그렇기에 논리를 쌓는 것은 구름을 벽돌로 빗어 집을 짓는 것만큼이나 꿈 같은 일이라 곧잘 질펀하게 뭉게지고는 한다.

감정에 제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그것에 대해 눈치채지 못하고 살 것이다.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고 오랫동안 바라보고, 그에 관해 이야기를 쌓고 난 후에야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평생을 함께 살아온 자기 자신조차 까마득하게 모르고, 세간의 평가를 꼬낏 꼬낏 모은 뒤에야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겨우 보이는 법이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적당히 둘러대기만 할 뿐인 세상이라
나는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은데도 뭔가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어서
그 무모하게 벼려진 마음이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말과 생각은 무뎌서 이리저리 두드려볼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220515 인연

사 오월 동안 사람을 많이 만났다.

잠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조심스럽게 이어가던 인연의 끈을 확 잡아 당겼다고나할까. 가끔은 몸살 기운이 올라올 정도로 바쁘게 요 한 두달을 지냈다.

벌써 15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동창의 연락이 와서 만나기도 하고, 근 2~3년 코로나를 핑계삼아 미루던 만남들이 계속 이어졌다.

오늘은 2~3년만에 고등학교 동창 모임 멤버들이 거의 다 모였다.
만났을 때는 거짓 한점없이 너무 즐거웠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헛헛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은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을 더 기꺼이 즐기는 사람이라 그렇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득 마음 속 여백의 의미를 알았다.

같은 길에서 같은 것을 보고 향해 가던 사람들이
작심하고 날을 잡지 않으면 만날 일이 없을 정도로 삶의 모양이 흩어져 버린 것에 대한 쓸쓸함이구나.

반대로 생각하면 그렇게 맺은 추억이, 이렇게 달라진 사람들을 아직도 묶어 주는 것이 대단하기도 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누구 하나 삶에서 낙오하지 않고 다들 떳떳하게 자신의 길을 내었다는 사실이 기특하고 또 만나서 자기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도 기쁘기 그지없다.

그냥 어제의 내가 너가 그립고, 오늘의 나와 네가 기특하다.
내일은 그냥 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