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에 대해 조금 적어 봄

요즘 시대의 혐오라는 것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나는 혐오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인간적으로 추구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혐오는 차이에서 발생하는 균열을 메꿀 의지가 없을 때 발생한다.
오해라는 것은 늘상 있는 것이지만, 그 문제를 끌어안고 싶지 않을때.
그 귀결은 혐오로 향한다.

재수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너나 나나 다 같이 틀렸다.
완벽한 것은 없고 누구나 조금씩 혹은 더 많이 틀렸다.
무작정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논의를 전혀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양하자.
언제나 당시의 상황에서 각각 양보해야 할 절충선이라는 것이 흐릿하더라도 존재한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 서로 할퀸 부분을 다시 서로 메꾸며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과정을 미루어 놓고, 변하기 싫은 시시한 자기 자신을 인정하기 싫어서.
타인을 끌어안아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편리한 혐오를 선택할 뿐이다.

혐오는 편리하다. 그리고 변화를 싫어한다.
사랑의 부재다.
나약함에 대한 증거다.

별을 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내자.

마음을 꿰어 하늘에 걸어두고 작은 나를 내려보자.

밤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런 나라도 반짝일거야.

걸어둔 맘이 눈에서 달아나지 않도록 고개를 들어.

진짜 별이 되는 날.
빛나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 봐 줄 누군가를 위해 반짝이고 싶어서 오늘을 짜내.

생각의 유연함

개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인간사는 관점의 문제다.

어른들이 세상을 어렵게 사는 것은 천박함이 쉬이 전염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것보다 빼앗는 것이 쉽고 빠른 전략이다.
때문에 사회에는 작은 악행들이 전파되고, 상처받고 다시 전염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부정적이고 어두운 믿음을 내면화한다는 점에 있다.

세상은 그저 있는대로 돌아갈 뿐이고, 사람이 선택한 가치관 각각에는 항상 거시적인 면면이 있다.
다수는 경험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처를 확대하고 흉터를 온 몸으로 잠식시킨다.
누구라도 세상을 부분적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점에 있어서, 이는 순전히 개인적 경험이라고 반문해볼만도 하다. 그러나 순수함을 잃어가는 것이 개인적 측면에서도 좋은 영향을 끼칠리 만무하다.

세상을 살아가며 이미 세우고 앞으로 세울 원칙들이 자신을 옭아맬 수도 있다.
과거의 경험은 현재를 제대로 살게하는 맞춤 양복이 아니다.

내 외부의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내 안에서 어떠한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결국 그것을 수용하고 말고는 내 선택의 문제다.
내가 살아온 시간과 함께한 생각들이 스스로에게 어떤 생각을 발화시키더라도 결국 그것을 수용하고 말고는 내 선택의 문제다. 관점/생각은 스스로가 비틀 수 있다.

삶을 즐거운 여행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을 유연하게 다루는 법을 배워야한다.
무언가를 쉽게 믿지말자. 자신의 믿음은 무의식을 이끄는 나침반이기 때문에 그 단어 하나까지도 엄밀하게 따져야하며, 하나의 격언 따위가 내 삶을 온전히 지배해서는 안된다. 늘 깨어있기를.

구름 너머

무지개가 피어난 곳.
뭉게뭉게 피어난 소문 뒤로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삶 고개를 구비 구비 내려보며
눈물의 씨를 뿌리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올려볼 적에는 또렷하던 것이
실은 디딜 곳이 하나 없이 높은 바다인 것을 보았습니다.

가슴이 저물듯 아파와
어느 한 점 눈길을 두기 벅차니
이제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18.02.14

어린 시절의 가장 큰 착각은 행복과 밝음에 대한 오해였던 것 같다.

잘한다면, 좋은 방향으로 간다면 나는 늘 충만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악마들이 알려준 잘못된 판타지였다.

아프지 않고 기쁘기만 한 것에는 의미가 깃들지 못한다. 진실에는 부재가 담기지 않는다.

잘못된 믿음을 쫓으며 진실의 눈을 가리지 않기를.

믿음보다 겸손이 앞서야

오늘은 모 음식 칼럼을 쓰는 사람이 떡볶이에 관해 평한 것이 논란이 됐다는 기사를 봤다.

그리고 그에 관해 사람들이 평한 글들을 읽었다.

내 생각은 이렇다.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고 그에 관해 충분한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한 사람은 어떤 스스로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경주한 노력은 그 의견에 대한 견실한 방패 혹은 믿음이 된다. 그 결론에 이르기 위한 궤적 안에 얄팍한 반론들의 가지는 스스로가 쳐내고 왔음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은 세상을 부분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답이라는 깃발을 꽂아봤자 그것은 스스로의 눈에만 비칠 뿐이다.

종종 많은 이들의 공감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의 진위 여부와는 전혀 다른 영역이다. 대게의 가치 판단에 답은 없다. 다만 믿을 뿐이다.

이것이 나의 의견이다.

튼튼한 성은 견고하게 쌓아올린 기반에 있는 것이지, 마지막에 얹어놓은 화려한 장식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자신이 답을 얻고자 노력한 것이 스스로를 무뢰한으로 만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2017.12.04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
아니,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조금 이른 시간에 깨어 어떤 느낌이 이어지더라도 곧 잊어서, 잃어버린다.
‘어떤 꿈을 꿨는데…’

그런데 요즘은 종종 꿈을 꾼다.
잠을 자다가 어떤 종류의 감정이 황급히 일어나 도망쳐 나왔기에 꿈을 꿨다는 사실을 안다.

대게는 마지막 생각이 머리에 멤돌 뿐인데, 그것들이 머리를 타고 내려와 가슴을 찔렀다.
평소에 당연시 여기던 몇몇 생각들이 여기저기 박힌다.

꿈은 우리의 머리 속을 재정렬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그것들은 내 곁에서 주변의 생각으로 남겨져있다가 새로 갈무리되어 결국 내 삶의 진실로 새로 자리를 마련한 것 같다.
그리하여 처음 그 생각의 경계를 넘어설 때의 충격을 고스란히 꺼내어 온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날들을 지나칠수록 과거의 나는 하루만큼 나와 멀어지고 있다고 느껴졌다.
나는 스물살의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의 난 10년,20년 뒤의 나를 좋아할 수 있을까?

조금도 알 길이 없어 상상력의 빈곤함을 탓해보지만서도, 의외로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그냥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될대로 되라지.

몸으로 목격하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정당한 값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공감에 대하여.
그것은 타인을 따뜻하게 녹여줄 수 있는 온도를 가졌느냐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진정으로 타인의 상황과 감정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일까?

경험에 대하여.
특정한 일을 겪었다는 것이 각각의 개인들에 발화시키는 무엇가에 절대적인 값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한 개인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는가? 경험이란 개별적인 것인가? 그로인해 남겨진 것들은 휘발되지 않는가?

요즘 유발 하라리의 극한의 경험(The Ultimate Experience)를 읽고 있는데 몸으로 목격하다라는 표현이 굉장히 와닿았다.

환희 또는 극심한 고통.
그런 종류의 경험 속에 있을 때 나는 그 기분만큼이나 커다란 다른 감정을 느끼고는 하는데, 오직 나만이 그 경험과 기분 속에 있다는 고독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생각들을 정리해 절묘한 결론을 내릴만한 재주는 내게 없다.
다만 오늘 나만이 경험하고 타인에게는 오롯이 전달될 수 없는 시간을 보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삶에 있어 의미란 무엇일까.
이러한 기분과 체험 역시 일상 속에 또 다시 휘발되어 갈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중요한 것은 나로 말미암아 누군가가 존재의 의미를 지니는 것 이상이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오직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우리들을 지탱하는 유일한 의미가 아닐까.

왜 그걸 자주 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