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1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이 있잖아요.
기쁠 때, 힘들 때.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든 나날들이 있는데 이 나날들을 그저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곱씹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그래야 좀 멋지게 나이를 먹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인간관계의 현실에 관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어. 맞아.”

관계에 오는 갈등은 통제하기 너무 복잡 미묘해서 내가 바뀌고자 노력하는 것이 한 명을 얻고 반대로 또 다시 한 명을 잃는 결과를 가져오는 ‘특성’에 불과하다면 관계에 대한 노력은 물거품 같은 것이다.
“아니. 완전히 그렇지는 않아.”

세상에는 동물과 다른 우리 인간의 기준이 있다. 그 중에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도 있다. 옳은 것, 그른 것, 불분명한 것. 개 중에 불분명한 것들은 늘 우리 인간에게 심오한 질문을 던지지만, 옳은 것과 그른 것 역시 명백하게 존재한다. 여기에 대한 기준점이 없이 누군가는 늘 나를 미워하는 것이 관계에 대한 진실이라고 규명하고 그저 ‘이게 현실이니 포기하는게 편해’라는 것은 바보가 되어 행복을 누리려는 비겁한 자의 변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꿔 말해 우리는 선한 자가 좋아하고, 악한 자가 미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물론 너와 나의 차이에 불과한 것들로 남들에게 미움을 살 수도 있다. 이런 문제는 현실적으로 인정 할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다음으로 중요한 질문은 관계에서 찾아오는 갈등 문제이다.
일단 누구와의 관계이던 갈등이 찾아오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 성격, 환경, 사건, 오해등 갈등이 일어날 요소는 차고 넘쳐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갈등 없는 관계는 이미 끊어진 관계이거나, 무언가 덧칠해진 관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대한 갈등을 만났을 때 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해소하려고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갈등 속에 관계의 신선함이 헤졌음을 인정하고 체념하거나 새로운 관계를 찾아나설 것인가? 안타깝게도 중간은 없다. 사람이 동시에 품을 수 있는 인간관계는 시간만큼이나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답은 없다.
각 관계의 중요도와 성격에 따른 개인의 선택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위에서 말한대로 한 사람이 긴밀하게 맺을 수 있는 인간 관계는 한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성품이 훌륭한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갈등을 해소해나가는 방향으로 인간 관계를 꾸린다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위의 영상은 박신양씨의 스타특상쇼 영상인데 행복에 대한 현실 인식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해서 덧붙여봤다. 힘든 시간 역시 소중한 내 인생이다.

이상주의자가 단단한 현실을 만나면 깊숙히 좌초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해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어둡게만 보는 것도 안될 일이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기르자. 냉소주의보다는 유머를 가까이하자.

시간과 라이프 스타일

어디선가 사람은 6살에 인생의 1/3, 20세에 2/3를 산 것과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유인즉슨 사람이 느끼는 시간이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빨라 진다는 것이다.(이 이야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아는 사람이 있다면 좀 알려주길 바란다.)
그렇다면 나 역시 인생의 많은 줄기를 지나와 가지를 향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금 오싹했다. 아직 꿈이 많고, 해보고 싶은게 많은데.
아무튼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간다는 건 많은 사람들의 경험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어느정도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게 사실이면. 반대로 시간이 감각의 예민함 혹은 새로운 경험과 같은 자극에 의해 더 길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할까? 우리의 시간이 빨리감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매일 똑같은 삶의 권태를 생략하기위한 뇌의 몸부림은 아닐까하는 것이다. 우주와 같이 거대한 시간 단위에는 절대적으로 미약한 찰나를 소유하는 우리라지만 그것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함부로 지껄여보자면 나는 그것이 아이처럼 행동하는데 있다고본다. 감정에 충실하고 계산과 고민을 하지않는 태도. 즉 삶에 감각을 열고 하나하나 집중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다 자란 어른이 행하기에는 바보같거나 무례해보일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못된 상사의 비수같은 말을 듣고도 허허 웃어넘기거나, 비위상하는 음식물을 입에 물고도 맛있게 먹을 줄 알아야한다. 이게 어른이 숙달한 사회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사실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완전히 아이처럼 살 수는 없다. 피터팬조차도 우리 곁에서는 날개를 떼고 내려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메야한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내가 추구하는 ‘자유’라는 라이프 스타일은 이런 것이다. 바보들에게 명령받지 않는 것. 부당한 것에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 욕심에 정당한 방식으로 솔직해지는 것. 수입이 지출보다 현저히 많아 가계부를 적거나 쿠폰을 모으는 잡다한 일을 하지 않는 것.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싶을 때 가는 것. 배우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것. 눈물이 나거나 웃음이 터질 때 감정에 솔직해 지는 것. 그런 것.

행복

행복도 취하고 무뎌지는 것이라 자꾸 탐하다보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결국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충만하게 행복한 상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행복에 대한 기준을 낮추고 끝없는 만족을 추구하기보다는 가치있는 일을 찾을 필요가 있다.
스스로 가치있다고 여기는 일을 헌신적으로 해나간다면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며 삶의 만족감도 더할 것이다.

※ 한강에 떠오르는 햇살이 참 예쁘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기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어릴 적에는, 몇 시간씩이나 이 짓을 하곤 했다.
그저 하염없이 창 밖에 고정된 건물이나 바삐 움직이는 점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군 시절에는, 거진 매일 이 짓을 해야만 했다.
못해도 일주일에 6일은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적막한 어둠 속을 2시간 내 바라보는 근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면 생각은 무수히 일어나고 정리되어 포개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버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들이 내 삶에 있어 가장 생산적인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데 익숙해진 것 같다. 넓고, 빠른 세상에 발 맞추기 위해서 생각을 달리는 연습을 해왔다. 잠을 줄이고, 더 촉박하게 일하고, 더 많은 것들에 닿기 위해서 바둥거렸다.
그럴수록 누가 했는지도 가물가물하고 상숭생숭한 이력들이 세상이 요구하는 명함에 하나씩 더해졌다. 단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을 뿐인데, 이 길은 잘못된 것임을 이제 알았다.

외로움과 공허함은 낙원으로 스포츠 카의 엑셀을 밟고 들어가 급히 목적지의 여행 스템프를 찍고 돌아온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바깥에 있는 것들이 아닌 스스로에게 집중해야 한다.
타인들의 시선에 재단당하는 것은 스스로 바라보고 있는 지점이 없기 때문이다. 소신이 있는 사람은 타인들의 편견에 부당함을 느낄 뿐이지 의기소침해지지 않는다.

자기 자신과 끊임 없이 대화해야 할 것이다.  욕망에는 솔직하게, 허나 진솔한 가치관을 가지고.
기사들이 누더기처럼 걸려있는 포털사이트나 감흥없는 남들의 자랑거리가 올라오는 SNS를 보는 대신에 오늘 아침 기분은 어땠는지, 직접 해보고 싶은 요리는 없는지, 내 삶을 어디로 이끌어가고 싶은지 물어야 할 것이다.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내게는 두가지 말 버릇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꿈이 뭐야?”

꿈이 뭐야? 원하는 게 뭐야?
“무엇을 하고 살 것 인가?” 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참 어렵다.
막연히 하고 싶은 일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맛있는 것을 먹는 것. 노는 것. 이런 것들은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이다.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남들에 비해 특별히 내가) 하고 싶은 것’일 것이다.
‘아니, 그래도 난 노는게 세상에서 제일로 킹왕짱 무지무지 하고 싶은걸?’
하지만 금수저를 타고나지 못한 우리는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금수저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더 이상 이 글을 읽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그냥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데 시간을 써라. 내가 당신이라도 그렇게 할 테니까. 이 글에서 삶의 이유에 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아무튼 여전히 먹는 게, 노는 게 좋다면… 어마어마하게 먹어라. 세계 최고의 푸드파이터가 되건, 너무 맛있게 먹어서 먹방계의 초신성이 되건, 밤새 게임을 해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던지 해야 할 것이다. 적당히 하는 건 누구나 좋아한다. 그 당연한 것들 속에서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어설픈 자세로는 힘들 것이다.

‘그건 평범한 직업을 갖는 것보다 힘들 것 같아.. 나 그냥 적당히 일하면서 취미로 하고 싶은 거 할래.’
그래. 잘 생각했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몇가지 문제가 있다. 헬조선이니, 지옥불반도니하는 별칭을 지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청년들은 5포세대라고 하고, 노인들의 빈곤/자살율은 OECD국가 중 1위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딱히 스스로의 처지에 연민을 가지거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 남녀노소 힘들게 살고 있는 대한민국조차 전 세계에서는 살만한 국가에 속하니까 말이다. 객관적으로 보아 전 세계에는 불행한 환경에 놓인 사람이 다수이고, 행복을 꾸려나갈 수 있는 환경에 놓인 사람이 극소수이다.
그래서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벌 수 있는 환경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게 아니다. 적당한 환경속에서 올바른 지침을 따라서 살아왔다고 해도 그건 어느 정도 운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최선의 안정성을 추구해 옳다고 여겨지는 지침을 따르되 나머지는 운에 맡겨야 할까?’
내 의견은 다르다. 이 짧은 글에 자세히 적지는 않겠지만 난 ‘안정성’을 일종의 허구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 세대는 대부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대한민국에 마지막 전쟁이 일어난지는 고작 60년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도 전 세계의 곳곳에서 사람들이 총탄에 희생되고 있다. 스마트폰이 등장한지 10년도 되지 않았지만 세상은 물이 흐르듯 당연하게, 동시에 빠르게 변해간다. 지금으로부터 20년 뒤를 예측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하물며 당신 인생의 안정성을 어떻게 따져볼 수 있을까?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과 다르게 평생을 발전하고 변화하는데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만약 당신의 내 의견에 동의한다면, 이제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의 미래를 인질삼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그것들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테니까.

게다가 내가 느끼는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서 성공할 자신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괴로워하는 일을 하면서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고작 버텨내는 것이 전부일 뿐이며, 보통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황금 낙원은 없다. 심지어 객관적인 모든 것들이 보수적인 직업을 선택하도록 종용한다고 해도 인생의 막바지에가서 반드시 후회할 하나의 선택을 하고 있다는 건 변함이 없다. 나는 당신이 심장을 뛰게 만드는, 하루를 더 살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 백번 옳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잘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뭔지 모른다는 데 있다. 나 역시 대부분의 대한민국 학생들이 지내온 학창시절을 보내왔기에 스스로에 대해서 너무도 무지했다. 그 후 20대의 대부분을 스스로에 대해 탐색하며 보냈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앞으로의 삶에 대해 중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조건들이 몇 가지 생겼다. 내게 가장 걸맞다고 믿었던 일들에서 환멸을 느꼈고, 스스로가 혐오하던 것들 중 일부는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납득할 수 있는 것들도 생겼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이 이럴 때는 밉지 않다.

새로운 변화를 원하는 나와 우리 가족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좋은 일이 가득하기를.

정보의 과잉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정보가 잔을 흘러 넘친다.
속이 부대껴 순간에 집중할 수가 없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무시하고 넘어가는 일들이 많아야 한다. – 랄프 왈도 에머슨

바로 내가 그렇다. 나름의 인내력을 발휘해 밀려오는 정보들을 막아보지만 종국에는 제 크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린 통처럼 정보들이 흘러내린다.
물론 두고 보면 언젠가 티끌만한 효용이 있을법한. 그럴듯한 변명으로 위장한 정보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보는 필요할 순간에 가서는 이미 낡은 것이거나, 혹여 바로 그 정보가 필요하다고 해도 금새 다시 찾을 수 있다.

스스로의 진료일지와 같이 개인적이고 추후에 반드시 쓰일 정보가 아니라면 모으지 말고, 소비하지도 마라.

스스로를 위한 실천적 방법

  •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를 제한적으로 사용한다 ; 온라인 커뮤니티는 오프라인 커뮤니티보다는 사교의 밀도도 떨어지고, 예상치 못했던 정보들이 난립한다. 이 정보들은 객관성도 보장 할 수 없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해당 정보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순간에 일시적으로 이용하도록 한다.
    현실세계와 SNS의 교류는 많이 다르다. 다양한 서비스의 SNS를 살펴본 결과 매니저가 아닌 일반인이 SNS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유희외에 없다.
    즉, 무작정 인터넷을 항해하는 것을 제한한다.
  • 내가 그것을 소비하는 목적을 명확하게 해라 ; 어떤 콘텐츠를 접한다면 유희가 목적인지 혹은 무언가를 배우거나 알아내려는 것인지 명확하게 해라.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는 없다. 적당한 재미와 적당한 정보를 동시에 섭취하는 것보다, 일처리는 빠르게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온전히 즐기는 편이 경험상 유용하다.
    목적을 명확하게하면 일이 잘못되거나, 내가 흥미를 잃었을 때를 빠르게 캐치하고 벗어나는 것이 가능해진다.
  • 한번에 진행하는 서브 프로젝트의 숫자를 2~3개로 제한하라.
    생각의 흐름은 바이러스와 같아서 신경쓰지 않으면 자꾸만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명상을 하듯 주된 목표에서 삶이 틀어져나가는 것을 인식하고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기를 반복한다.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몸에 익혀야 하는 습관이다.

필기, 디지털 필기의 필요와 활용방식

펜과 노트.
글을 적을수도 있고, 그림을 그릴수도 있습니다.
이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고전적인 기록 방식 중 하나입니다.

필기는 아주 개인화된 정보입니다. 순간적인 생각의 포착, 무언가를 하고 얻은 감상, 체계화된 지식의 개인적인 외적 구성, 일정등이 노트에 포함됩니다.
사실 이런 개인적인 정보들을 온전히 자신의 두뇌만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남에게 내 생각을 들킬 염려도 없고, 따로 필기구를 소유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의 두뇌는 쉽게 망각하며, 여러 생각을 한꺼번에 잘 처리하지 못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 장거리가 무엇인지 기억하는 일은 우리 삶에 필요하긴 하지만 반드시 머리로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필요한 순간에 해당 정보에 접근할 수 있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에 필요하지 않은 생각과 기억들을 덜어 내 깨끗하게 정리된 생각의 공간은 우리에게 여유를 주는 것과 동시에 명쾌한 사고를 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필기”란 나중에 유용하게 쓰일지도 모르는 생각 조각들을 압축해서 필요할 때 즉시에 찾아볼 수 있는 제 2의 두뇌 창고로 옮겨 운영하는 행위입니다.

 

현대로 오면서 필기 역시 단순하게 종이에 잉크로 옮겨적던 손 필기(아날로그)에서 “디지털 필기”로 진화해갑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정보를 작은 칩 안에 구겨 넣는데 성공했고, 통신의 발달로 저장된 정보에도 언제 어디서나 접근가능해졌습니다. e -book을 통해 거대한 도서관 전체를 손바닥만한 태블릿에 담아 가지고 다닐수도 있고, 각종 클라우드 서비스를 통해 평생동안 찍은 영상과 사진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디지털 정보의 특성과 소프트웨어의 발전으로 인해 디지털 필기는 아날로그 필기에 비해 다음의 강점을 가집니다.

  1. 저장공간의 제약이 없다.
  2. 정보의 접근성이 높다 (어디서나, 쉽게 검색해서).
  3. 수정이 쉽다.

위에서 제가 언급한 내용은 별로 어려운 내용은 아닙니다. 단순히 전자문서화의 특징을  다시 한번 언급한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러면 현 시점에서 각 개인이 디지털 필기(개인화된 메모)를 어떻게 운영하는 것이 좋을까요?
오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 것입니다.

컴퓨터 시대로 오면서 우리는 메모의 종류를 몇 가지 방식으로 분화시켜 살펴볼 필요를 느끼게 되는데, 이는 타이핑이라는 새로운 입력방식과 영상/음성의 기록덕분입니다.
타이핑은 손으로 적는 것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글의 입력이 가능합니다. 대신 이미지를 그려낼 수는 없죠. 여기에서 1차적인 분화가 일어납니다. 전에는 자유롭게 사용하던 그림과 도식등의 이미지를 극히 제한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음성 녹음과 동영상 녹화 역시 새로운 정보 저장의 형태입니다. 단언컨데 보고 듣는 것은 글을 읽는 것보다 절대적으로 빠릅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디지털 메모를 단순히 타이핑 방식(전자 문서화)으로만 이용하는 것보다는 각 쓰임에 맞게 사용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1차적으로 메모를 할 때는 Keep(구글 킵)에 하고 때에 따라서 플로팅 메모가 필요하면 1초 메모를 이용합니다.
이것들을 다시 가공한 사진 + 음성 + 간단 도식 + 타이핑 정보는 검색이 용이한 Evernote(에버노트)에 저장하고, 큰 캠퍼스에 시각화가 필요한 아이디어 스케치나 압축 정리된 마인드 맵은 Onenote(원노트)에 저장합니다. 동영상의 경우 아직 저의 쓰임이 한정적이라 Youtube(유튜브) 저장하고 링크를 에버노트로 따오는 형식으로 운영합니다.

결정론에 관한 아주 개인적이고 조악한 글

올 한해 내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던 화두는 ‘결정론’이다.

나는 본디 운명따위는 믿지 않는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노력의 가치를 신봉하며 자랐고, 또한 늘 과해보일 정도로 목표에 집중하며 삶의 길을 내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욕심은 많은데, 타고 난 것이 없으니 운명 따위 엿이나 먹으라며 그저 그렇게 된 것이다.
아무튼 보통 사람들이 운명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과학자들은 결정론이라고 부른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내리 깔아보는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어려서부터 신은 없다고 생각해 왔다. 머리가 굵어가며 차츰 사회의 부조리함에 익숙해졌는데 이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근거가 되었다.
권선징악은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같은 역량을 가진 선과 악이 대결을 펼친다면, 단연코 악이 승리한다. 악하다는 것은 결과에 이르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이 선하기 때문에 절대 사용할 수 없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 이타적인 가치를 신봉하는 것이 더 고되고, 나쁜 결과를 낳는가? 그렇다면 신의 가면 뒤에는 악마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인가? 그래 그럴바에 신은 없는 편이 낫겠지.

하지만 어느날 신 존재증명을 읽고 난 뒤에 세상의 정점에 뭔가가 있어야만 할 것같은 쎄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은 아니다. 굳이 밝히자면 나는 불가지론자이다. 다만 인간은 우리 세계 바깥에 대해서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일단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며, 우주 너머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은 짧은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만 고민하는 게 좋겠다고 나의 11살 일기장에도 적혀있다.

그러면 운명도 믿지 않고,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말자는 주의인 내가 왜 결정론을 가지고 이토록 고민을 하게 된 걸까?
내가 이성적이라고 그리고 현 시대에서는 가장 진실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고 믿는 물리학자 중 일부가 결정론을 지지한다는 사실에 큰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믿음’이 아닌 증명가능한 ‘근거’를 바탕으로 생각하는 과학자들이 결정론을 지지한다?
물론 현대에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미시적 영역에 대한 불확실성을 근거로 결정론이 입지가 크게 줄었으나, 여전히 결정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아직 밝혀내지 못했을 뿐, 모든 것에는 규칙이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넘어가 하마터면 결정론자들의 의견에 삶을 저당잡히고 침몰할 뻔했다. 다행인 점은 그들의 의견 역시 믿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 어느 누구도 모든 것에 예측가능한 규칙이 있을 것이라고 천명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런 믿음은 그저 인격신이 있다고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나의 이런 글을 결정론자들이 본다면 내가 자라온 환경과 내가 타고난 기질 그리고 내 기분등 모든 것들에 의한 결과로 내가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말하겠지만 그런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알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믿는 것이 다를 뿐이며, 믿음에 관해서는 서로 터치하지 않는 것이 현실적으로 현명하다는 사실을 많은 종교&정치 토론에서 배웠다.

실은 얼마전 아는 형과 여행을 갔다가 새벽까지 음주 토킹중에 결정론에 관해서 토론 할 재미있는 예시가 하나 떠올랐는데 여기 적어보고 싶다.
한 개인이 어떤 선택을 내리는 일을 가정해보자. 전 우주의 모든 시간을 거슬러 그러한 선택은 무한대에 가깝게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오늘 야식으로 라면을 먹을까? 말까? 하는 선택에 조금의 소숫점 오차도 없는 환상적인 50%:50% 의 시행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까? 단연코? 물론 이런 일은 내가 우연히 빌린 책 속에 1등 당첨 로또가 들어있을 확률보다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희박하지만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을 통틀어 단 한번도 없을 것인가.. 나는 왠지 한번쯤은 있을 것 같다.
그래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한번쯤 있을 것 같다고 믿는다.

‘신은 결코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고 아인슈타인은 말했지만 내가 창조주라면 나는 랜덤함수를 만들어 넣었을 것이다.

사실 모든게 결정되어 있다고 해도 나는 상관이 없다.
나는 아직까지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영화 속의 주인공으로 순간을 살아가는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아서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주체적인 캐릭터로 살아갈 터이니 참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