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22 – 성북동

구글 타임라인은 실제로 누락된 경로도 있고 좀 지저분하다.

길상사가려고 몇 년만에 놀러온 성북동.
한성대입구역 6번출구로 나와 걸어가다가 지도에 ‘성북동 미술관’이 보이기에 호기심이 생겨 아이스크림 하나 사들고 올라 가 보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건물 하나만 덩그러니 닫혀있었다.

아쉬운 맘에 가까운 성락원을 밖에서라도 볼까하고 성락원 옆 길을 타고 내려왔다.
지난 번에는 예약에 실패했지만 가을에는 성공하리라.
성북동에는 대사관들이 참 많다.

다시 큰 길로 내려와 간송 미술관 앞을 지나갔다.
지금은 운영 준비 중이라 긴 줄은 커녕 인기척도 없었다.

조금 더 가다보니 성북구립미술관이 있어 잠시 들렀다. 작다.
조금 땀을 식히고 길상사로 갔다.

카카오맵을 믿고 가다가 막다른 길로 들어갔다.
전에도 여기서 막혔었는데. 두번째인지, 세번째인지. 바보같이 매번 같은 골목에서 막혀 돌아간다. 네이버 지도에는 업데이트가 되어 있던데. 짜증나서 이번에는 수정 신청도 했다 ㅋㅋ
그래도 이번에는 두 지도가 모두 틀린 곳을 또 하나 발견했다.
잠시 당황하고 있었는데 골목에 서 계신 아주머니께서 길을 알려주셨다.
예전에 왔을 때와는 집들이 좀 달라졌다고 느끼며 골목을 돌았다.
길상사 앞 큰 길쪽으로 나와 음료를 한 잔 마셨다.
그냥 버스타고 올라왔으면 편했을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름 재미있었다.

길상사는 앉아 쉬던 앞 쪽만 기억에 남아있었는데 한 바퀴 돌아들어가면서 기억이 되살아났다. 법정스님 이름도 오랫만에 듣는구나 싶었다.

길상사를 나와 삼청각으로 갔다. 그냥 안 가봐서.
삼청 터널쪽 큰 길은 인도가 너무 비좁아 주택들 사이를 통해 갔는데 성북동 멍멍이들이 엄청 짖어댔다. 아파트에서는 들을 수 없는 우렁찬 소리에 좀 놀랐다.
삼청각은 조그만 공원같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보다는 차량으로 오고가는 행사장 같은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알고보니 식당이더라. 이름만 보고 사찰인 줄 알았던 나. 바보같은 나.

내려오는 길에는 만해 한용운 심우장(생가터)에 들렀다.
아이들이 안에서 놀이를 하고 있어서 한참을 구경하다가 나왔다.
종이 하나가지고 어쩜 그리도 재미있게 노는지, 어쩜 그리도 말이 많은지. 놀랐다.
너무 자연스런 분위기에 평소 안면이 있던 지인의 집에 잠시 앉아 쉬는 기분이 들었다.

해가 떨어져가기에 큰 길쪽으로 나와 금왕돈까스가 유명한 것 같아 금왕정식 냉큼 삼키고, 와룡공원쪽 길로 돌아 성균관대를 통해 혜화역으로 갔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뮤지컬 배우들의 리허설?, 버스킹?을 잠깐 듣다가 집으로 갔다.

MBTI에 관하여

인터넷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한 MBTI 검사가 있어서 해봤다.
예전에도 두어번 해본 것이지만 결과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이번 결과는 INTJ-T가 나왔는데 지난번에도 전략가형, 리더형 이런 수식어가 나왔던 것으로 대충 기억한다. 사실 저장해놨는데, 어디 해놨는지 까먹음.
어릴 때 했던 검사도 공학박사나 예술가 이런 쪽으로 가라고 했던 걸로 보아 아무튼 내향적인 결과가 나온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원칙을 세우기를 좋아하고, 결과에 피드백을 받아 전략을 짜는 것을 좋아하는 면이 잘 설명된 것 같았다. 조금 더 궁금해서 INTJ에 관해 구글링해보니 참 신기하게도 내 취미를 기가 막히게 맞췄다. (독서, 뭔가 배우기, 달리기, 수영등)

그래서 좀 더 알아보았다.
결론적으로는 개인이 큰 의미를 부여할 검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단 수 많은 종류의 사람을 고작 16가지 유형으로 분석하는게 아니올시다. 분류 카테고리가 16가지라면 분류 기준은 더 적을 것이다.
1900년대라면 이것을 과학이라고 불러줄 수 있겠지만, 바야흐로 4차산업 혁명의 카테고리에 빅 데이터를 넣어놓는 시대가 아닌가. 내게 맞춤형 성격분석을 달라!
물론 이 데이터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바는 아니나, 한 개인은 자신의 하루 하루로 피드백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고작 16가지 모양의 상자 안에 자신을 우겨넣고 분석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물론 경영학이나 조직에서는 개인들을 자원으로 활용하는데 써봄직한 것 같다. 분명히 맞는 구석이 있고, 명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얼추 끼워넣어 사용하면 그만일테니까.

자기 자신의 주관으로 점수를 메기는 것도 한계다.
한 때 SNS에서 인기가 있던 엠그램에도 접속해봤다. 친구들이 하라고 보내줄 때마다 해보아서 3번의 데이터가 몇 년에 걸쳐서 쌓여있었다. 비교해보니 대부분은 연속적으로 결과가 같았지만, 아주 상반된 결과로 나온 수치들도 있었다. 그럼 내가 몇 년동안 유의미하게 성향이 바뀌었다는걸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 유의미한 환경적 충격과 변화가 없었다. 당시 순간적인 기분과 판단이 달랐다고 생각하는게 합리적일 것 같다. 사실 질문도 모호하고 엄밀하게 잘 만들어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이런 유명하고 데이터가 많이 쌓인 자료는 쓸모가 있긴하다.
그동안 관찰해온 나에 대한 성향과 테스트 결과가 일치하는 지점. 그 지점에 대한 타인들의 유효한 충고는 분명히 가치가 있다. 아주 미시적인 부분에 관해 내가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확신을 하고 있을 경우, 도움이 될 조언을 부분적으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꿈이란 닿을 수 없어야 꿈이다.
혹은 계속해서 달릴 곳을 새로 마련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념없이 달리고 있는 상태. 그것이야 말로 진실된 꿈이다.
사람이란 만족을 모르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머리로 만족을 한다한들 꿈을 쫓을 때처럼 완벽한 상태에 있을 수는 없다.

칙센트 미하이가 말한 ‘몰입’만이 우리를 삶으로부터 완전히 도피시킬 수 있다.
‘열정’과 ‘긍정’이 혼합된 상태다. ‘불안’ 또한 섞일 수 있음이다.

나는 운이 좋아서, 목표한 것들을 꽤 이뤘다.
하지만 무언가를 얻음으로서 안식에 도달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달려온 속도로 어딘가에 처박히기 일쑤였다.

나는 내가 달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열등한 정신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날뛰는 마음을 잠재울 그릇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게 다 그렇다는 걸 알게됐다.

좋은 인생이란, 좋은 흐름으로 계속해서 달리는 것이다.

숨이 벅찬 것을 즐겨라.
세상이 잘 돌아갈 것이라는 쪽에 도박을 걸어라.
슬픔과 고통의 언덕은 오직 웃으면서만 넘을 수 있다.
종종 휴식을 취하되 멈추지 말아라.

20190410

하늘은 물 탄 먹색이었다.
검은색으로 차려 입는 것이 예의라지만 객이란 그저 고마운 것이라 들었다.
그래서 하늘도 좀 바삐 왔나 했다.

순간, 정말 바삐왔는지 하얀 눈발이 날리는 듯 했다.
벚꽃잎이 검은 구두의 광택을 휘감아 가리어 객을 조신케 했다.
꽃이던 눈이던 생이건 무슨 상관이냐는 듯.
그저 떨어져 날렸다.

죽기는 쉽고, 살기는 어렵다던 말은 오만임을 배웠다.
죽기 또한 생각보다 어려워 죽은 자와 산 자 모두 죽도록 울었다한다.

‘산 자는 죽은 자를 마음에 묻어, 맘의 깊이가 결국 알 수 없는 바닥까지 닿겠구나’했다.
어른의 여유란 실은 깊은 슬픔이었구나.

믿음이란

주말에는 오랜 친구와 등산을 다녀왔다.

실제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활동이지만, 오랫만이었고 좋았다.
신변잡기와 은근한 농담이 흘러간 뒤에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하게되었다.

친구는 오래된 기독교 신자다.
얘기를 나누다 결국에는 하지 말아야 될 이야기. 즉, 믿음에 관한 주제를 스치게 되었다. 믿음이란 정치와 돈에 얽힌 이야기만큼이나 치명적-유혹적이고 위험한 주제 선정이다.

나는 그가 10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부수고 새로 짓는 과정을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았다.
그렇기에 그의 생각을 내 나름대로는 진심을 다해 존중하고자 한다. 또한 나는 (무신론자가 되어야 된다는 의견에 점차 설득되어가고 있는) 불가지론자로서 그를 베지않고 빗겨나가는 일에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신실한 그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말은 이미 예전에 꿰뚫은 구멍을 통해 지나갔기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몸에 입은 오래된 흉터를 상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내게 약속을 했다.
나는 그 약속이 지켜지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나처럼 독한 종류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약속이 진심임을 알았다.

그래서 조금 슬펐다.
이 세상에 흩어 뿌려진 진심을 담은 약속이 얼마나 많을까 잠시 잠깐 생각했다.

믿는 것이라는 건 뭘까하고 생각을 했다.
이유를 묻지 않고 진심을 다해 믿는 것일까.
아니면 끝까지 그 생각을 지켜내는 기개일까.
우문같다.

현답을 내리고 싶었다.
나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다만 정해진 일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후에 그것이 결국 잘못한 일로 밝혀지고 말지라도, 나는 그것을 잘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잘못된 일에 대하여 반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하루를 잘해내기만 하면 된다.

말과 생각은 우리 삶만큼이나 미묘해하고 변덕이 심해서,
나는 오직 행동만을 믿는다는 다짐을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모호하고, 잘하라는 말은 폭력적이다.

다만 스스로를 사랑하고, 이성을 믿음으로 삼는다면 결과는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재능과 노력이란 얽힌 가지는 비바람을 견디는 고목의 밑동과 같은 것이라,
인력으로 고난을 견디어 내는 시간을 더할 수는 있으되 빛에 도달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태풍에 꺽인데도 부끄럼없이 제 인생을 살았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삶에 운이 닿아 비 개인 맑은 날을 만난다면 그것은 퍽 감사한 것이지,
실은 개인이 꿈으로 삼을만한 일은 아니다.
마음이란 쉬이 차지 않는 달 같아서
모자라면 헛헛하고, 온전하여도 기울까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각 존재에게 주어진 박탈할 수 없는 자유란.
가장 인간적인 일.
타고난 동물성에 온전히 반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우리가 인간답다고 칭하는 일.

본성에 반한 고귀한 존재로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다.
옳은 것들을 고르고, 사랑을 지키고, 하루의 지난한 싸움에 패한 자신을 다시 믿는 것.
종국에는 자신이 믿는 인간으로서 죽는 것이다.

고개 숙여 꺽지 말아라.

애쓰지 않아도 때가 되면 지니.

꽃아.

고개 숙여 꺽지 말아라.

애쓰지 않아도 때가 되면 지니.

꽃송이, 나비 날개 될 수 없듯.

꽃은 꽃이거늘.

바람에 묻혀 나른 꿈들 나 몰래 흩어간데도.

성성한 한 가지.

이슬 핀 방울 하나는 족히 맺으리라.

2019.02.12 흐른다

20년을 넘게 알고 지내온 녀석이 곧 결혼을 한다.

지난 주말에는 신부가 될 분과 녀석을 만나 식사를 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무 자연스레 대화를 나눴다.
마치 녀석의 옆에 원래부터 누군가의 자리가 있었던 것 처럼.

녀석은 오랜 벗인 내게 이런 저런 투정을 한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태도에 신부의 표정이 뾰루퉁해지는 게 보이지도 않나보다.
결국 핀잔을 주는 건 내 역할이다.
우정의 자리를 사랑에게 조금 더 내어주는 일은 서먹하게 기쁘다.

요즘에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사실 머리로는 알고 있었기에 당연하게 넘기면서도 남의 일을 보는 것 같은 일들이 태반이다.

어른 연기를 그럭저럭 해 낼 정도로 나이를 먹었구나 한다.
‘너무 늦게 달리고 있지는 않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쓸쓸해졌다.
여전히 투정 부렸으면하고서 어린 맘이 그립다.

어린 날들과 바꾼 추억들은 곱게 빚어졌을까.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돌이킬 것을 생각하니 지금 또한 참 시리다.

2019.02.04

안될 줄 알면서도, 질 줄 알면서도 피는 꽃처럼, 하루를 켜켜이 모아 가는 발걸음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슬픈 일만 허락된 줄 알면서도, 그 이야기를 덤덤하게 한 줄 한 줄 써내려가는 삶은 얼마나 고귀합니까.

시작과 끝이 함께 있는 것처럼 삶의 심지는 늘 죽음을 향해 있어. 깃털 한 올 같은 생, 불 태워 하늘 한가득 채우기 원하는가 봅니다.

잠시 잠깐 빛나는 모습 너무도 애달프고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