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낙서전 – Take Me Out

위대한 낙서전을 봤다. // 2018.08.23 – K현대미술관

요즈음에는 예전처럼 전시가 막 땡기는 것은 아니지만 K현대미술관에 가보지 않아서 한번 방문해보고픈 맘이 있었고, 실은 압구정도 한 바퀴 돌고 싶었다.

나는 그래피티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래서 전시에 관해서 딱히 할 말은 없다.
나는 모르는 것은 모르는 그대로 느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 생경한 경험 또한 나중에는 다시는 못 느낄 중요한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이지만 멋진 색감과 강렬한 것들을 잘 느꼈다.
이번에 느낀건 딱 그정도. 다음에 또 기회가 있어서 보게 된다면 이번에 맘에 들었던 포스터를 그린 작가에 대해 공부하고 갈 것이다.

위대한 낙서전
이 오바마 포스터 완전 맘에 들었다. 엽서를 왕창 사려다가 나는 편지를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을 거뒀다.

참고로 내가 이 포스팅을 적는 이유는 사실 노래1 때문이다.
전시에 깔린 노래가 더럽게 맘에 들었기 때문이다. 친구한테 말하는 것이었다면 나는 분명히 더 강렬한 표현을 썼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음악찾기 어플을 깔아 노래 제목을 알아내려고 시도해봤지만, 스마트폰에 당장 지울 수 있는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집에 돌아와 녹색창에 대차게 검색을 해봐도 이 노래를 언급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
불행 중 다행인지 하루의 1초를 남기기 위해 짤막하게 찍은 동영상과 Shazam의 도움으로 이 노래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특히 중간의 기타 독주가 맘에 든다.


  1. Franz Ferdinand – Take Me Out 

무언가에 대해 중얼대는 건 결국 자신을 활자로 삼아 찍어내는 글과 같다.

그리고 의사소통이란 대게 한 쪽은 토해내고, 반대편은 듣고 싶은 것만을 체로 걸러내어 듣는 우스꽝스러운 과정이다.

이를 극복해보려 노력해봐도, 존재란 인간의 언어로는 번역되지 않는 것이기에 생각과 언어를 깊이 바라보는 것은 사람을 기괴하게 만든다.

우리가 가진 도구로는 답을 찾을 수 없게 만들어졌음을 인정해야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답을 쫓도록 만들어져있다. 모순이다.

절로 발화되는 생각이 답이 아님을 기억해야한다. 자기 스스로를 반박할 수 있으나 그 역시 더 우월한 의견은 아니다. 다만 그것들을 모아 총체적으로 바라보려고 해야한다.

산다는 건 그것들 중에서 한 가지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정의가 뭔지 어릴 적보다 더욱 모르는 나이가 되었다.

믿음은 논리와 섞이지 않으며, 논리 역시 감정을 정당화하는 도구 중 하나로 쓰임을 인정할 때.

나는 주변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입장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게 지혜라고 불려온 것들이 아닐까 한다.

2018.08.22

간만의 뻘글.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를 여유롭게 빨다가 생각했는데.
노화는 꽤나 합리적인 전략이다.

물론 내 개인의 의지는 고려되지 않은 오로지 유전자의 영속성 관점에서 생각되는 일이지만. 아무튼 그렇다.

살다보면 다치기도 하고, 이런 일 저런 일을 겪으면서 신체가 최적의 상태를 유지할리없다.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성이 떨어지는 점이 가장 클 것이다. 성장기를 거치고 난 뒤 한동안의 환경에 최적의 신체를 유지하겠지만 그 뒤로는 변화하는 환경에 생물학적인 능동적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

그러니 주기적으로 새 틀로 갈아타는게 참 합리적인 전략인 셈이다.

그래도 나라는 자아가 보기에는 밥맛 떨어지는 결론이다.
더 고민해보면 자연은 의지와 개인의 자아에 별 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은 모양이다.
경험에 대해서도.
경험이 중요하다는 건 의외의 환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경험은 미래를 방해하기도 하니까. 더해서 고민해보면 자아라는 것도 인간의 제일 끔찍한 환상과 희망일 수 있겠다. 나야 Freeunwill은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사람이지만, 꼭 그렇다는 건 아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빅뱅을 상상한 천재들이나 가능하지, 난 내 두뇌로 내 차원을 뛰어넘는 상상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짜 낼 수 있는 옷은 이 세상에 주어진 옷감 그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바나나 우유를 다 마셨지만 조금 더 머리를 써보자면.
반대로 개인의 자아와 경험이 어떤 임계점을 넘어선다면 생물 스스로가 노화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인간의 역사가 보여주듯 노화가 먼저 정복될 것 같다. 사람들은 복잡계보다는 기계를 다루는데 능하고, 생물을 기계처럼 바라보는 것도 썩 잘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일 엄청난 태풍이 온다고 하는데 내 방은 덥다는거다.

코딩 야학

코딩 야학을 신청했다. (2018.07.20)

딱히 커리큘럼에 대한 계획은 없어서 만만한 ‘코딩수업(WEB1)’을 신청했다.
그동안 혼자 구글링을 통해 해왔기 때문에 차분하게 조금씩 가다듬어 볼 생각이다.

요즘 매너리즘과 우울감에 빠져있었는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진도를 체크하며 수업을 진행한다거나, 이쁘게 찍어 준 시작증 하나에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코딩야학 시작증
그렇게 며칠 텀을 두고 이틀동안 WEB1을 다 들었다.(2018.07.24)
누구나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고 간결한 수업이었다.
일단 WEBn쪽 수업들은 가볍게 들을만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매일 조금씩 진도를 나가보려고 한다.

 

2018.07.24

일상을 팽팽히 살아내던 와중에 잠깐의 틈을 내어주면,
오히려 나만의 생각에 깊이 빠져들고는 한다.

억누른 욕망이 튀어오르듯 깊고, 빠르게 생각의 숲으로 들어간다.
언어가. 두뇌가 달리는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스쳐갔는데, 논리가 따라 붙지 못했다고 여겨져서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듯 천천히 그 느낌의 궤적을 쫓아가야 할 때가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어떻게 설명하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소리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는 소리다.

믿음에 속지 않고 현실에 살겠다는 얘기다.
그 덕에 결코 단호해지거나 단단해질수는 없겠지만, 그 대신에 솔직함을 선택하겠다는 말이다.

나는 젊은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 솔직한 미숙함을 사랑한다.

지혜롭게 나이를 먹어가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자신을 잠시 밀어내고 다른 사람에게 내미는 손길을 사랑한다.

나는 단지 솔직하지도 않으면서 미숙하고, 남을 존중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변호할 줄 모르며.
조금 세상에 빗겨서서 그렇게 부끄럽게 세상을 관음하고 있다.

요즘은 이대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고삐없는 말을 타는 인생도 한번쯤은 괜찮지 않나싶다.

 

 

씨몽키 키우기 두번째

다이소에 갔다가 우연히 씨몽키를 보았다.
그리고 한 상자를 사 집으로 가져왔다.
왠지 익숙한 전개.

실은 2년전에 씨몽키를 길렀던 적이 있었다.
두달여를 기르다가 모두 죽어버렸는데, 왠지 맘이 편치 않아 앞으로는 기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이런 걸 두고 선택적 망각이라는 건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번에는 잘 기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번에는 가장 작은 2,000원짜리 씨몽키 세트였는데, 이번에는 3,000원짜리를 샀다.
‘조금이라도 큰 곳에서 기르면 좀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번에는 두 달(2018.05.01~2018.07.10)을 조금 더 살았다.
하지만 역시나 몹쓸 짓을 한 것 같다.

이번에 알게 된 문제점을 살펴보자면 아래와 같다.
일단 같이 동봉된 공기 펌프의 내구도가 조악해서 일 이주만에 찢어졌다. 덕분에 나는 매일 빨대로 공기를 불어넣으며 인간 여과기 역할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날수록 물이끼가 끼었고 한 눈에 보기에도 물이 탁해졌다. 물갈이도 고려해봤는데 기존 생존 환경과 염도를 맞추지 못하면 치명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포기했다.
즉, 애초에 다이소 세트는 씨몽키들이 장기간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닌 것 같다. 그 정도 기간을 예상하고 먹이도 딱 그정도만 넣어놨겠지…

나는 녀석들을 부화시켜놓고 또 시한부 삶을 살게 한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든다. 애초에 제대로 기르려면 물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구비해야 하는데 그것들이 이뤄지지 않았다.
다시 생각이 닿으면 다음에는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 작은 물생활을 시도해볼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다이소에서 씨몽키 세트를 다시 구입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한달 정도 지나 많은 수의 씨몽키가 죽자 가족들도 몹쓸 짓을 하는 것이라며 나를 비난했는데, 특히 어머니는 알테미아(씨몽키)가 다른 물고기들의 먹이로 많이 쓰인다는 사실을 알고 여러모로 너무 안됐다고 하셨다.

아무튼 살아있는 녀석들을 직접 죽일 수는 없어서 탁한 수조에서 오랜 시간을 살게했다. 그리고 오늘 죽은 녀석들을 건져 화분에 묻어주었다. 녀석들에게 직접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018.07.06

요즘은 삶의 모든 것에 대한 의욕이 없어서, 이것 저것 그저 만지작 거리고 있던 차에, 예전에 깔아두었던 구글어스 프로와 스페이스 엔진에 손이 갔다.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는 세상의 광대함은 온 몸을 쭈뼛하게 만들었다.

“There are only two ways to live your life. One is as though nothing is a miracle. The other is as though everything is.” 라던가.

혐오에 대해 조금 적어 봄

요즘 시대의 혐오라는 것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나는 혐오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인간적으로 추구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혐오는 차이에서 발생하는 균열을 메꿀 의지가 없을 때 발생한다.
오해라는 것은 늘상 있는 것이지만, 그 문제를 끌어안고 싶지 않을때.
그 귀결은 혐오로 향한다.

재수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너나 나나 다 같이 틀렸다.
완벽한 것은 없고 누구나 조금씩 혹은 더 많이 틀렸다.
무작정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논의를 전혀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양하자.
언제나 당시의 상황에서 각각 양보해야 할 절충선이라는 것이 흐릿하더라도 존재한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 서로 할퀸 부분을 다시 서로 메꾸며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과정을 미루어 놓고, 변하기 싫은 시시한 자기 자신을 인정하기 싫어서.
타인을 끌어안아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편리한 혐오를 선택할 뿐이다.

혐오는 편리하다. 그리고 변화를 싫어한다.
사랑의 부재다.
나약함에 대한 증거다.

별을 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내자.

마음을 꿰어 하늘에 걸어두고 작은 나를 내려보자.

밤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런 나라도 반짝일거야.

걸어둔 맘이 눈에서 달아나지 않도록 고개를 들어.

진짜 별이 되는 날.
빛나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 봐 줄 누군가를 위해 반짝이고 싶어서 오늘을 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