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행동 빚기

마음의 길은 습관적으로 발화되는 것이다.

어떠한 행동에 다양한 이유를 붙여보지만 반례와 치명적인 반론은 늘 존재한다.

어떤 종류의 감정이나 생각도 온전히 이성적일 수 없음을 인정하자. 인정하기 싫지만 거의 모든 생각과 행동의 근저에는 지난 경험과 유전 지도에 따른 판단이 앞서있다.

크게 생각하기 위한 첫걸음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서 잠시 떨어져나와 바라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나 스스로를 내가 원하는 대로 컨트롤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황 속에 있는 모든 개인에게 가장 나을 행동을 하는 것이다.

현명한 행동이란 습관이 되지 않으면 불쾌하고 화나고 힘든 종류의 것이다.

수렵 채집 동물인 인간의 몸과 두뇌는 원래 현명하게 행동하도록 조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혜롭다는 건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동물로 태어났다고해서 그렇게 죽을 필요는 없다. 불편함도 익숙해지면 내게 맞는 옷이 된다.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순수함을 유지하고 추하게 늙지 않으려면 경험을 사례 판단의 척도가 아닌 사고의 폭을 넓히는데 이용해야 한다. 그러자면 타인을 대할 때 직관의 일부 영역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경험을 쌓아 사고를 넓히되 실제 사실이 아닌 부분을 스스로 채워넣어 판단하지 말 것. 모든 사례는 개별적으로 판단하고, 관계에 최선을 다할 것.

우리가 경험적 직관에 의지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이익을 주기도 한다. 허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나 사랑, 배려등 숭고한 가치는 그런 동물적 감각을 일부 제한함으로서만 추구할 수 있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길은 더 많은 상처와 자기 연민을 이끈다. 그러나 진정 고귀한 가치를 성취하기 위한 다른 길을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있는데 그런 것들의 값은 인내와 자기 성찰의 시간으로 지불해야 하는 법이다.

원칙을 정하되 그 원칙을 스스로 부술 수 있는 유연함을 연습할 것. 원칙이나 사상은 모두 사회적 합의에 불과하므로 인위적 믿음에 매몰되어 더 중요한 가치를 잃는 과오를 범하지 말 것.

환기미술관 –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지난 토요일(2016.07.23) 부암동에 위치한 환기미술관에 다녀왔다.
미술관의 위치가 지하철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버스로 환승을 해야했다. 마침 근처에 부암동 서울미술관 + 석파정이 있는 까닭에 버스에는 주말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로 붐볐다.

그래도 버스를 내려 환기미술관으로 방향을 트니 조금 여유로워졌다. 얕은 언덕길을 올라 미술관으로 들어가니 주차장이 보였는데 따로 차량 확인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주차 요금은 무료인 것 같다.(따로 알아본 것은 아니니 차량을 이용하실 분들은 자세히 알아보세요.)
이번에 엄마랑 같이 미술관 나들이를 했는데 다음에 다시 오게되면 차를 끌고오면 편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환기미술관_01

참고로 환기미술관은 이름에서 예상 할 수 있다시피 수화 김환기 작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다. 작가가 작고한 후 미망인인 김향인씨가 설립한 환기 재단을 통해 미술관이 설립됐다. 김향인씨는 내가 좋아하는 시인인 이상의 아내 변동림과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있다. 하지만 관련한 내용을 정확히 모르는 터라 글로 함부로 적기 어렵고 천천히 더 알아보려고 한다.

김환기 작가는 한국 추상미술의 1세대라고 한다.
본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작가가 어린 시절에 그린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천장으로 된 전시실에 그림들이 조화로운 배열로 벽면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아이다운 그림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전시실을 찬찬히 따라가며 느낀 특이한 점은 작품들이 ‘무제’였으며 다만 작품들 사이로 김환기 작가가 쓴 일기가 한 토막씩 적혀있을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게 참 맘에 들었다.
다른 미술관이나 전시관에 가면 빼곡하게 적혀있는 많은 정보들이 나를 덥쳐오는 기분이 좋지 않아 늘 몇몇 인상적인 것들만 느끼고 나머지를 무시하려고 노력했는데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작품들은 김환기 작가의 점화들로 이어졌다. 미술관 내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어 팜플렛의 한 면을 대신해 올려보건데 점화란 아래와 같은 느낌이다.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팜플렛

점을 찍고 그 점을 작은 네모로 감싼다. 거기에 몇가지 변화를 더해 전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런 점화들이 매우 커다랗게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이것들이 형형색색의 블랙홀, 아니 색이 모두 다르니 칼라풀한 홀인 것 같았다. 색색홀!
오묘하게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다. 나는 점화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흰 벽과 인공적인 조명이 인상적인 본관 내부를 따라 작품들을 감상하고 나왔다. 나는 이 본관의 정갈한 매력이 맘에 들었고, 엄마는 부암동의 풍치에 푹 빠졌다고 했다.

환기미술관_02
본관 옥상에 설치된 조형물

1층을 매표소와 카페, 아트샵으로 사용하고 있는 별관의 2층에서는 <당신과 나 사이> 라는창작 공모전 당선작이 전시중이었다. 공간속에 켜켜이 얽힌 실들의 모습이 사람 사이의 인연에 대해 기존에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일맥상통 하는 부분이 있어 인상 깊었다. 내 머리속에는 무한한 숫자의 사람들의 삶이 선과 교점으로 얽혀있는 무한한 실타래의 이미지가 들어있다.

마지막으로 미술관의 우측편에 위치한 수향산방의 전시실도 잠시 들렀다가 집으로 향했다.

환기미술관은 여러모로 내 맘에 꼭 맞아서 다음 기획 전시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종종 방문하게 될 것 같다.

사전

나는 사전이 좋다.

지금이야 대게 온라인으로 사용한다지만, 어릴적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먼지 향이 물큰하게 바닥으로 깔리던 사전이 생각난다.
서먹하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좋았다.
그 낯설고 형용되지 않던 혼란함이 차차로 익숙해지는 기분이 좋았다.

내가 생각하는 것. 머리로 보기 때문에 나만 보이는 것들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낯선 단어들을 보고 있으면 그만큼이나 세상과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맘이 안정됐다.

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사진은 그저 빛을 박제한 것에 불과하기에 나는 그것들을 언어로 박제하려는 시도를 해본다.
짐짓 이런 저런 표현을 치렁치렁 달아서 내가 느끼는 것들과 비슷한지 비교해본다. 그리고 성에 차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앞뒤로 깍둑깍둑 썰어본다.

사실 글을 적는다는 건 나를 더 투명하게 번역하는 행위인 것이다.

씨몽키 키우기

다이소에 갔다가 우연히 씨몽키를 보았다.

‘새우.. 어떻게 진공 상태에서 부화할 수 있지?’라는 호기심에 가장 작은 것을 구입해와서 집에서 부화시켰다.

설명대로 미온수에 알을 풀어주고 부화시켰다.
설명서에 적힌 것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새우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티끌처럼 작은 녀석들이 힘차게 물속을 휘젓고 다녔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공기를 불어넣어주고 먹이를 주기 50여일.
어제 마지막 씨몽키가 죽었다.

한 달이 지난 후로 숫자가 급격히 줄어 7마리, 5마리, 4마리 이렇게 한둘씩 영문도 모르게 죽어가더니 결국 이렇게 되었다.

본래 수명이 2~4개월이라는 얘기도 있고(위키백과), 최대 2년이라는 말도 있는데 뭘 믿어야 할 지 모르겠다.
워낙에 완구 어항이 작기도 하고 산소도 계속해서 넣어줄 수는 없는지라 오래 살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본격적인 물생활을 하려면 또 규모가 너무 커질테고.

어릴 적 동네 어귀에서 가끔씩 팔던 병아리를 사서 키우다가 죽은 기분이다. 녀석들이 본래 건강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어딘가 생명을 경시한 기분이 들어서 맘이 편치않다.
사실 구입할 때도 금방 죽어버리면 괜시리 맘이 불편할 것 같아서 망설였었다.

중간 중간 여행을 갈 때 가족들한테 맡기기도 미안하고, 작으나마 그 생명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것 같아서 참 뭣하다. 아직 다른 생명에 대한 의무는 무겁게만 느껴진다.
언젠가 개를 기르고 싶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다.
반면 아버지는 생각외로 이 작은 생명체에 엄청난 관심을 가지셨다. 아버지야말로 반려 동물이 필요한 때일런지도 모르겠다.

2016/07/15

누구의 울음소리인지도 모를, 수 많은 작은 것들의 울음 소리 사이로 고야 열매가 떨어지면서 건넛방 작은 지붕을 쿵쿵거리며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누가 처들어오는 줄 알고 놀랬건만 이제는 좀 익숙하다. 도시는 그리도 덥다던데 이곳의 바람은 서늘해서 두꺼운 이불을 덮고도 감기에 걸릴까 맘이 쓰인다.

서울에서 차로 고작 두시간 거리이것만 맘은 한 평생을 떨어져나온 것 처럼 다르게 느껴진다.

그곳에 있을 때는 작은 내 세상이 삶의 전부인것만 같은데, 여기서 거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늘상 잊어버리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모습이 워낙 다채롭기 때문인지 삶이란 뭔지 참 모르겠다.

고행인가 싶으면 달콤하고, 즐겨볼까하면 목을 죄어온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요즘에는 힘들어도 마음에 깊이 베이지 않고, 즐거워도 흠뻑 취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무감해지지는 않은 느낌인데, 내가 가진 언어로 쉬이 표현이 되지 않는 그런 기분이다.

아무튼 서늘한 바람과 풀잎에 고이는 소리에 취해 버리면 이런 기분이라는거다.

귀여운 슬리퍼

슬리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람들은 살 때 빼고는 거기에 뭐가 달렸는지 관심도 없으면서 저걸 귀엽게 만드려고 하지?”

뭔가 생각하려다가 ‘사람이란 원래 이상한게 정상이고, 이성적인 순간은 가끔 찾아오는 손님같다’는 생각으로 덮고 그만뒀다.

연극 면회

동숭무대소극장, 6월 25일 16:00

※ 본 글은 극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무대 위에는 작은 면회소가 설치되어있었다.
제목이 면회인만큼 공간을 가로 질러 나누고 있는 탁자가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실은 극의 초반에 감옥이라는 공간 구성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것은 얼추 맞아 떨어졌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감상 콘텐츠는 결국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야기는 재미 또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전하고 싶은 가치를 대변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그것들을 전하기 위한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면회’의 경우에는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가짜 공간을 마련해놓았다.

극의 시작과 함께 남자는 자신이 결혼하려했고, 누군가를 살해한 여자의 면회를 온다.

교도관은 면회를 온 사람들에게 재차 ‘접견’이라는 용어를 주지시키는데 나는 여기에서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극의 배경이 실제 교도소라면 면회든 접견이든 상관이 없지 않을까? 즉, 남자는 접견이라는 용어만 사용가능한 어딘가에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곧 남자가 안에 넣어줄 수 있는 물품에 대해 물었을 때 ‘살아있는 것은 넣을 수 없어요’라는 대답에 여자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남자가 선물로 가져온 것들이 면회실에 계속해서 쌓여가는 것들을 보고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여자의 친구 역시 “예전보다 조금도 더 나이가 들어보이지 않는다.”라고 여자의 죽음을 재차 증명해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자는 본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결혼전에 자살을 하고만 것이다. 남자는 그렇게 죽어버린 여자의 분향소를 계속해서 찾아온다.

2층 317호에 죽음으로 박제된 여자는 말이 없으나,  남자의 마음 속 감옥에 2317번으로에 수감된 여자는 남자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왜 하필 결혼을 앞둔 그녀였을까?
극에서의 결혼은 두 남녀가 도착하지 못한 곳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자의 죽음은 관계의 종말로 볼 수도 있다.

사실 여자가 이미 죽어있었다고 얘기했지만, 극은 전개과정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겪었던 감정의 변화로 여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과정을 우리에게 재현해준다.
즉, 이 극은 남녀간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자는 이야기한다.
“거기는… 아니 여기는…”
이 극은 어떠한 벽으로 나뉜 공간에 존재하는 남녀간의 이야기이다.

여자는 이야기한다.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우리는 종종 상대방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있는 것 같다는 허무맹랑한 착각을 하고는 한다.
하지만 여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상대가 뭘 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진실된 말을 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사실 상대방에게 말해줄 수 있는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 역시 본인이 스스로를 분석한 결론에 불과하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한다.

관계에는 많은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 원치않게 또 다른 이성이 눈에 들어올 수도 있고, 일이 너무 바쁠 수도 있다. 그런 일들이 생긴 건 남자의 잘못이 아니듯, 우리들의 잘못도 아니다.

하지만 ‘세상이 마음을 이끄는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부여한 믿음을 따를 것인가?’ 는 온전히 스스로에게 남겨진 선택의 몫이다. 둘 중에 무엇이 옳다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은 분명 오만한 짓일 것이다.

다만 나는 체로키 인디언의 두 마리 늑대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새겨보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