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4

안될 줄 알면서도, 질 줄 알면서도 피는 꽃처럼, 하루를 켜켜이 모아 가는 발걸음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슬픈 일만 허락된 줄 알면서도, 그 이야기를 덤덤하게 한 줄 한 줄 써내려가는 삶은 얼마나 고귀합니까.

시작과 끝이 함께 있는 것처럼 삶의 심지는 늘 죽음을 향해 있어. 깃털 한 올 같은 생, 불 태워 하늘 한가득 채우기 원하는가 봅니다.

잠시 잠깐 빛나는 모습 너무도 애달프고 아름답습니다.

Microsoft To Do

Wunderlist(원더리스트)를 계승한 To Do 프로그램이다.

따로 설명은 없지만 #을 적어서 태그를 사용할 수 있다. 태그는 클릭하여 모아보기가 가능하다.

하위 목록 및 노트를 적을 수 있으며, 알림&기한&반복 설정이 자유롭다.
노트나 하위 목록이 있는 경우 제목에 표시되므로 상세 내용을 줄여 보기에 편하다.
하위 할 일은 한 단계만 가능하다.

오늘 할 일/ 중요한 일/ 기한이 있는 일 / 할 일
이렇게 4가지 심플하고도 확연한 분류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목록(리스트) 설정이 가능하다.

아직 많이 써보지는 않았지만 빠른 것 같다.
기존에 사용하던 TickTick은 많이 사용함에 따라 무거워짐을 느꼈다.

현재까지의 느낌. 미니멀하고 가볍다. 필요한 것들을 쏙쏙 골라놨다.
안드로이드 버전은 나중에 이어서..

파일 및 이미지 첨부 기능은 없다.

일정을 미룰 때 ‘오늘 나중에’, ‘내일’, ‘다음 주’ 그리고 그외에 설정을 할 수 있는데 ‘다음 달’ 항목도 있었으면 편했을 것 같다.

20181231 한 해를 마무리하며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붙박이장 처럼 세월 속에 굳게 잠겨 변함없을 날들이,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기쁜 날이 되기도 하고 혹은 아주 괴로운 날이 되기도 한다는게.
그래서 종종 기쁨은 거짓으로 속여 만들어 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가끔은 대본을 읽는 것처럼 억지로 화를 내는 것 같은 때가 있었다.

물론 생각의 머리를 조금도 틀 수 없도록 압도되어 흘러간 시간도 많았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나날이 아주 조금씩 줄어들어 한번은 내가 제 멋대로 모노드라마를 찍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리고 요 며칠은 최근의 10여년을 돌이켜 보았다.
많은 것들이 사그러들어 당시의 생생함을 잃었지만, 순간마다 기억의 생체기는 남았고 그 모든 것들이 현재의 나를 감싼 덩굴로 엮이었다.
피와 살로 이뤄진 우리 존재는 요즘 유행하는 여러 것들처럼 곧 바로 필요한 부분만 더하거나 잘라 덜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 동안 애송이였다가, 결연해졌다가, 물렀다가 다시 단단해졌다가.
가끔은 여유를 가졌다가, 하루는 세상에 둘도 없는 겁쟁이처럼 벌벌 떨었고 오래 전 살았던 고귀한 이처럼 현명한 순간도 있었다.
막을 수 없는 시간처럼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온전히 지켜낼 수 없었다.
내가 얼만큼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세상을 살고 느낀만큼 변했다.

스스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와중에도 ‘세상은 보는 방향을 따라 간다’는 생각은 더 살아갈 용기를 준다.

세상을 그저 아름답게만 보아 넘기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온갖 종류의 도취 또는 마취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그 무언가를 마음에 담을 수 있다.
마음에 담은 그 무언가는 시간이나 타인이 빼앗아 갈 수 없음이다. 오직 스스로만 포기하거나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번번히 잊어버린다. 그러니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찾아내 그것들을 매일 소중히 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린 날에는 믿고 싶지 않았고, 지금은 아는 사실중 하나는 운칠기삼(運七技思)이다.
삶의 많은 부분이 개인의 노력보다는 운과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나라는 존재가 노력으로 세상에 일으키는 파문은 매우 미약하다.
10여년 전에 알았고 지금도 아는 사실 중 하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사람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앞으로도 평생을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은 밝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마음은 구겨지지 않고 늘 빛나는 무언가를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운이 따르기를 기대하고 쫓으며, 운이 따르지 않았을 때를 대비한다면 세속적인 어려움은 없지 않을까.

생각은 이리저리 날뛰어

네가되고 내가되고

실은 어찌되든 상관없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머물러야 되는 곳은 한 점이라.

그리웠다가 미웠다가, 그러다가 고맙고는 한다.

온전할 때에는 투명할 뿐인데 깨어지면 저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발산하고 마는 유리처럼, 생의 질곡도 온전한 상태로는 눈 덮인 맹인처럼.

2018.11.03

가끔 종교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냥 믿는 것으로 모든 진실을 장막 뒤로 제쳐두고 그저 내가 맘이 유리한 대로 세상을 대하고 싶다.

또 가끔은 모든 시간들을 좋은 기억으로 뒤덮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아늑한 공간속에서 존재하다 죽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하지만 저절로 주어지지 않았기에 스스로 그곳을 향해 도망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진실로 바라보는 모든 것이 내 이야기이며, 작고에는 가슴 저리는 아픔조차도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짧은 이야기를 더 이상 어린 마음으로 낭비하지 않기를.

나는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불가지론자에 기독교적 무신론자로 남아있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여러가지 도덕 관념이 전반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와중에 그것을 지켜낼 논리적인 함의를 발견하지 못했다.

세상을 정글로 인식하고 타인을 배경화하여 살아가고자 한다면 일면 합리적 대응과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겠지만, 그 덕에 의미 자체의 상실을 겪을 수 있기에 조심스럽게 가치를 정립해나가야 한다.

거울의 한 면이 비춘 타성의 믿음이 아닌 자신이 정립한 도덕관을 신이 부재한 상태로 세울 수 있을까.

이건 무모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일단의 그의 생각을 훔칠 수 있는대까지 훔쳐야겠다.

무언가에 대해 중얼대는 건 결국 자신을 활자로 삼아 찍어내는 글과 같다.

그리고 의사소통이란 대게 한 쪽은 토해내고, 반대편은 듣고 싶은 것만을 체로 걸러내어 듣는 우스꽝스러운 과정이다.

이를 극복해보려 노력해봐도, 존재란 인간의 언어로는 번역되지 않는 것이기에 생각과 언어를 깊이 바라보는 것은 사람을 기괴하게 만든다.

우리가 가진 도구로는 답을 찾을 수 없게 만들어졌음을 인정해야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답을 쫓도록 만들어져있다. 모순이다.

절로 발화되는 생각이 답이 아님을 기억해야한다. 자기 스스로를 반박할 수 있으나 그 역시 더 우월한 의견은 아니다. 다만 그것들을 모아 총체적으로 바라보려고 해야한다.

산다는 건 그것들 중에서 한 가지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정의가 뭔지 어릴 적보다 더욱 모르는 나이가 되었다.

믿음은 논리와 섞이지 않으며, 논리 역시 감정을 정당화하는 도구 중 하나로 쓰임을 인정할 때.

나는 주변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입장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게 지혜라고 불려온 것들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