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만들던 중 요네즈 켄시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노래의 첫 구절부터 이 사람이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할 수 밖에 없다는 건 그 사람이 사용하던 물건이라도 내게 말을 걸어줬으면 좋겠고, 묘하게 남은 향이 날아가는 것이 너무 싫어서 하루가 완전히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맘이니까.
아무튼 태어나 버린 이상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는 떠나가야 하기에 이별은 아무래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 참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애를 써서 의미가 있다고 이름표를 붙여놓은 것들은 돌이켜보면 대게 부질없고, 그저 기쁘고 슬퍼하고 화나고 즐거운 일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일들이 오직 삶 그 자체고 우리가 살았음을 밝히고 있으니. 그걸 알면서도 매일 매일 하루하루에 파묻혀 잊고 마는 것이 참 인간적이다 싶고 우습다. 그러다 가끔 다시 찾아오는 선명한 하루는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알려주는 것 같다. 어쨌든 어떻게든 하루를 살고 있구나. 이건 오늘이고 오고 있는 건 내일이고. 내가 없을 내일까지 여기 그대로 있겠구나.
많은 종류의 고민들은 이미 물어보았고 답을 내렸기에, 비록 만족스럽지 못한 답이라도 그저 묵묵히 믿는대로 따르면 그 뿐입니다.
최근에 많이 하는 생각은 모든 것을 기적으로 바라보는 가치관입니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자연스럽다고 표현합니다. 자연이 그대로 있었고, 우리는 그에 익숙해졌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우연히 그 모든 것에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만약 내가 물이 필요하지 않는 생명체라면, 물이 필요한 존재를 보면서 얼마나 기이한 맘을 품을까. 왜 우리는 다른 생명을 섭취하는 괴상한 의식을 통해 하루를 연장하는 구조를 갖게되었을까. 왜 세계가 이렇게 독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음에도, 어떻게 우리는 그것들을 당연하게 받아 들일 수 있는 황당무계한 사고를 부여받았을까.
이런 생각이 한번 뿌리를 내리면 세상의 모든 것이 기이하고 놀라워집니다. 그 모든 우연. 제 머리로는 셈할수도 없이 끝없이 펼쳐진 가능성 위에 놓인 한 점의 현실.
하나의 삶이 소유한 작은 시공간에서 가장 멋진 점은 우리가 자유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쫓는게 무엇이건. -믿는 것, 부여된 혹은 만든 의미나 이야기 – 심지어 자유라는 건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포기하는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말도 안되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을 빌려쓰고 있다는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은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제일 먼 곳까지 날아갑니다. 어쩌면 불가능했을 그 모든 것이 있었고, 있을테니까요.
내일이 되면 또 다시 인간적인 문제들이 삶을 가로막고, 오늘을 위한 문제들로 눈을 가릴 것을 압니다. 해가 뜨면 해야 할 일을 해야하고, 미래를 오늘로 가져오기 위해서 사람이 만든 규칙안에 내 몸과 마음을 끼워 맞출 것을 압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라는 한 점이 여전히 말도 안되는 기적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마음만은 어디에도 쫓기지 않고 내가 원하는 나로 존재 할 수 있습니다.
삶은 기적이라는 말로 남을 위로하거나 설득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좋지 않은 점은 사는 것보다 죽는게 합리적일수도 있는 현실을 만나서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삶이 개인에게 허락한 것은 그런 곤경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도움을 주고, 그런 불운을 만난 자신을 세상이 돕도록 청하는 것뿐입니다. 그런 현실적인 한계 속에서 누군가는 타인보다 더 가혹한 세상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제가 여전히 불가지론자로 남아 세상을 쏘아보는 이유입니다.
낙관주의자가 저를 설득할 수 없듯, 우리도 세상이 모든 면에서 평평해지도록 설득할 수 없습니다. 차면 기울고, 기울고 나면 다시 차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기이하게도 말이죠.
그럼에도 저는 또 생각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놀랍고 이해할 수 없다고요. 이 자연스러운 생각은 그 어떤 모순에도 불구하고 저를 인간적인 문제들로부터 떼어내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이는 자연의 경이에 비하면 인간이 만든 퍼즐이 너무도 작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세상의 경이를 보고 있으면, 누군가의 마음이 당신을 해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자기 자신일지라도요.
불편함에 대한 예민함, 편안함에 대한 무뎌짐, 망각 이 세가지 때문에 인간은 우리가 행복이라고 상상하는 것에 영영 도달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먼저 살았던 생각이 깊은 사람들이 단지 마음의 평화가 행복이라고 주장한 까닭이 이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이 짜증스러웠고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그 평화라는 것이 생각보다 더욱 더 도달하기 힘든 것인 것에 반해 보상이 너무 적은 것처럼 여겨졌다.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을 만들어 이런 세상에 가둬둔 것들은 얼마나 심보가 고약한 놈들인가 생각을 하다가 반대로 결국 이런 모순에 갇힐 정도로 미묘하게 모순적인 존재들만 지금 이 세상에 살아남은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똑똑하거나, 더 미련하거나, 더 감정적이거나, 더 아둔하거나 이런식으로 조금이라도 더하거나 덜한 존재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것 같다.
그럼에도 남겨진 유일한 것은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인 것 같다. 자유가 실존하던 그렇지 않던 우리는 그렇다고 믿을 수 있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를 행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원시적은 사회에서는 힘이 그것의 기반이었고, 사회에서는 결속력이 미약해 듬성듬성한 울타리 같은 룰이 그것을 대신한다. 이성이라는 것이 주어졌으므로 다른 존재의 자유 역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보면 자연은 무질서한 엔트로피로 향해가고, 이성은 정리하려는 강박을 가진 인간의 감옥인 것 같다. 그럼에도 나라는 질서를 가진 하나의 개인 존재는 그것을 감내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질서를 부여하려는 마음이 인간의 숙명인 것 같다.
세상 속에서 계속 삶을 따라가는 것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유연하려고 하고 나와 같이 이런 불합리한 여행을 하고 있는 다른 존재들의 마음을 어렴풋하게 상상해가면서 그냥 살아가는 것 뿐이다. 다만 마음은 거창한 무엇을 향하는 게 아니라 눈 앞의 이야기와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는 걸 잊을 때마다 상기할 수 있어야겠다.
사람들은 가끔 세상을 많이 보거나 이런 저런 경험을 통해, 혹은 지식을 통해 그렇지 못한 다른 이들과의 우열을 가르려고 시도한다. 일면 이해가 되지만 유한한 인간에게 앎이란 일생에 채우지 못할 못이고, 어렵사리 도달한 깨달음이란 실은 뒷걸음질에 닿기도 하는 티끌같은 관점의 차이다.
우리가 바보같은 건 어쩌면 어른이 되기에는 너무 짧은 생에 어른이 되기를 강요받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남과 자신을 구분하려고 하는 강박은 우리들이 생각이라는 개개인의 맞춤 감옥에 갇혀있기 때문에 생긴 신경증이라는 상상을 한다.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는 이 흥미로운 언어 퍼즐은 실은 진실의 근사값에 불과하기에 늘 모호한 경계를 자유로이 타고 넘는다. 그렇기에 논리를 쌓는 것은 구름을 벽돌로 빗어 집을 짓는 것만큼이나 꿈 같은 일이라 곧잘 질펀하게 뭉게지고는 한다.
감정에 제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그것에 대해 눈치채지 못하고 살 것이다.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고 오랫동안 바라보고, 그에 관해 이야기를 쌓고 난 후에야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평생을 함께 살아온 자기 자신조차 까마득하게 모르고, 세간의 평가를 꼬낏 꼬낏 모은 뒤에야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겨우 보이는 법이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적당히 둘러대기만 할 뿐인 세상이라 나는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은데도 뭔가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어서 그 무모하게 벼려진 마음이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잠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조심스럽게 이어가던 인연의 끈을 확 잡아 당겼다고나할까. 가끔은 몸살 기운이 올라올 정도로 바쁘게 요 한 두달을 지냈다.
벌써 15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동창의 연락이 와서 만나기도 하고, 근 2~3년 코로나를 핑계삼아 미루던 만남들이 계속 이어졌다.
오늘은 2~3년만에 고등학교 동창 모임 멤버들이 거의 다 모였다. 만났을 때는 거짓 한점없이 너무 즐거웠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헛헛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은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을 더 기꺼이 즐기는 사람이라 그렇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득 마음 속 여백의 의미를 알았다.
같은 길에서 같은 것을 보고 향해 가던 사람들이 작심하고 날을 잡지 않으면 만날 일이 없을 정도로 삶의 모양이 흩어져 버린 것에 대한 쓸쓸함이구나.
반대로 생각하면 그렇게 맺은 추억이, 이렇게 달라진 사람들을 아직도 묶어 주는 것이 대단하기도 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누구 하나 삶에서 낙오하지 않고 다들 떳떳하게 자신의 길을 내었다는 사실이 기특하고 또 만나서 자기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도 기쁘기 그지없다.
그냥 어제의 내가 너가 그립고, 오늘의 나와 네가 기특하다. 내일은 그냥 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
삶의 바닥에서 죽고싶다와 살려달라는 말은 쉬이 넘나들 수 있는 경계에 위치해 있다. 두 말 사이의 본질은 도망치고 싶다는 것이고, 바닥의 중력에 잡힌 사람에게 죽을 각오로 살라는 이야기는 저 아랫 세상의 풍경을 본 적 없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한 개인의 바닥에서는 지성도 성품도 별 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굶주린 자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음식뿐이듯 삶이 위태로운 사람에게는 오직 절망보다 큰 삶의 의미만이 필요하다. 허나 그것을 스스로에게서 이끌어 낼 수 있었다면 이미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의 목숨을 저울질하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므로 결론은 대게 타자에게 있다.
물론 제3자에게 귀책의무가 없으므로 비극은 자주 그리고 점점 더 자주 일어난다. 또한 선한 의도를 가진 들 우리들은 대게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중생이라 알면서도 주변인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할 때가 있다. 괴로운 일이다.
나는 마치 미로 같다고 생각했다. 절망에 빠진 이는 분별없이 가장 가까운 문을 출구로 여기고 달려나간다. 그 길이 사는 길인지 죽는 길인지는 오직 운에 의해 찰나에 결정되는 것이다. 지금 사는 길도 막다른 길에 연결되어 있을지 알 수 없다.
허락된 것은 오직 아끼는 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더듬어 나가는 것 뿐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내 맘대로 되지 말라고 만들어놓은 것 같은 현실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책을 덮었을 때, 그 이야기가 슬프더라도 다른 이에게 흉으로 남지는 않기를 바란다. 그 책의 주인공도 그리 말했으리라.